평화통일 Vol 2122024.11·12

탈북민 정착 이야기Ⅰ

김수아 통일안보 전문가

“ 안보 강연으로
北 참상 알리는 게 제 사명”

대홍단은 북한 양강도 동북단에 위치한 시골 동네다. 백두산 아래 백무고원에 속한다. 해발 1300m가 넘는 추운 지역이며 한반도의 지붕이라고 할 수 있다. 옥수수를 비롯한 밀, 보리도 재배하지만 농작물 총생산량의 70%에 달하는 감자 농사로 이름난 곳이다. 1998년 김정일은 ‘감자 농사 혁명’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13년간의 군 복무를 마친 31세의 젊은 청년 1200명을 대홍단 감자 농장에 배치했다. 그들은 농촌진출자로 낙인돼 다른 직장이나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고향으로 갈 수도 없었다. 국가의 철저한 규제 속에 꼼짝없이 갇혀 대홍단에 뼈를 묻어야 했다.

“윤동주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 다짐”
전체주의의 역기능과 순기능이 버무려진 이곳에서 그의 인생이 시작됐다. 북한이탈주민 출신 통일안보 전문가 김수아(44). 1980년생으로 백두산 대홍단에서 태어나 고사총구분대와 반간첩기동선전대에서 활동하다 2015년 10월 탈북했고, 그해 12월 한국에 정착했다. 현재 국방부와 국립통일교육원 등에서 통일안보강사로 활약 중이며, 유튜브 채널 ‘대홍단왕감자’를 통해 북한과 한국의 문화 차이를 알려주는 유튜버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강연 핵심은 주민의 자유와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메시지다.

10월 중순 가을의 문턱에서 만난 김 씨는 검정 원피스를 입고 최근 발간한 자전적 수필 ‘꽃등’을 들고 있었다. 고향을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40대 여성으로 여겼을 것이다. 책 제목을 꽃등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김 씨는 이렇게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좋아해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시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을까 생각하며 창가에 놓아둔 꽃등을 켜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별을 노래하는 마음이 이런 것일까’ 싶더라고요. 그때 저도 시인처럼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책을 차근차근 읽어봤다. 자유를 찾아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픈 이의 염원을 담은 책이다. 특별히 세 장면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노동당 입당이라는 희망을 주고 노력하면 된다는 기대감으로 토대(어떤 집안에서 태어났는가를 따지는 것)가 좋지 않은 젊은이들을 이용하던 북한군 간부들, 영양실조에 시달리며 전기 부족으로 물 공급이 끊겨 위생적으로도 열악한 탁아소에 맡겨진 제대군인의 아이들, 중국으로 건너가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마음으로 압록강을 건너다 급격히 솟구치는 물살에 휘감겨 영영 다시는 머리를 내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 했던 북한 인민들….

“북한의 현실과 그 안에서의 저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자전적 수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게 배고픔의 설움과 구속의 답답함이죠. 배고프고 답답해서 삶을 마감할 때의 심정이 어떠하겠어요. 수많은 북한 주민이 굶주림과 억압에 억눌려 죽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가요.”

차분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다. 그가 결연한 표정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자의 처절했던 삶, 목숨 건 탈북 과정, 한국에서의 적응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싶었다”며 “나의 이야기를 통해 북한 주민과 북한이탈주민의 삶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 씨는 북한에서 최하위 계층 신분(해방 전 지주 계급)으로 살았다. 신분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사총중대에 자원 입대해 3년간 군 복무를 했다. 결혼 후 가정을 꾸렸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청진과 대홍단을 오가며 화장품, 제지 배달 등 장사에 뛰어들었다. 고생하며 돈을 벌어도 윗선에 뇌물을 건네야 했기에 생활고는 여전했다. 그러던 중에 김 씨 언니네 가족이 중국으로 탈북을 시도하다 중국 공안에 붙잡혀 북송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린 딸과 언니네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백두산을 돌아 압록강을 넘어 한국 땅을 밟았다.

‘한반도 통일’이란 소명으로 강연
김 씨는 인천공항에 들어섰을 때의 첫 감정은 “감격 그 자체였다”고 했다.

“화려한 샹들리에, 금빛 크리스털 조명, 유리처럼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넘어질까 두려워 잔걸음으로 걸었습니다. 무엇보다 국정원 직원의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인사말이 큰 감동이었어요.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무사히 대한민국에 왔다는 행복감이 물밀듯 밀려오더군요.”

가정을 꾸리고 나서 그는 본격적으로 북한과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안보 강연을 시작했다. 강사로서 안보 강연뿐만 아니라 탈북민의 성공적인 정착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연구하다 보니 ‘하나원에서 하는 탈북민 교육 방법을 달리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서도 탈북민의 교육은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남북하나센터나 지역 행정복지센터를 통해 교육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탈북민이 경제적 이유 등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 사회에서 반평생 살아온 이들은 경제 시스템은 물론 정보력에서도 상당히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탈북민들이 조금 더 실정에 맞는 현실적인 교육을 받는 게 좋겠다는 바람을 안고 국민대 글로벌평화통일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현재 국립통일교육원과 국방부를 비롯해 여러 단체에서 북한 실상을 알리는 강연을 하고 있다.

“북한 또는 안보 관련 강연에 대한 수요가 그리 많지는 않아요. 하지만 탈북민으로서 수익보다는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소명을 지니고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통일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오늘도 강연장으로 향합니다.”

글· 김건희 기자 | 사진· 김도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