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10 Vol.217

가정폭력과 홀로코스트

우리는 전통적으로 가정 내 문제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걸 바람직하게 여기고 또 선호하였다. 그 복잡하고 내밀한 특별 관계를 괜히 제3자가 아는 척하며 상관하기보다는 “칼로 물 베기”인 부부관계 일은 내부에서 알아서 해결하고, 자식 교육도 각자 가풍에 맞춰 알아서 지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지혜롭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본 골격은 지금도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상황이 많이 변한 것 또한 사실이다. 부부간 문제나 자녀 양육 문제도 외부의 상담과 자문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고, 설혹 가정폭력이나 아동방임 문제로까지 확대될 경우, 외부의 개입은 물론 형사처벌로 연결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체벌도 예전처럼 “사랑의 매”로 마냥 허용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국제관계에서 내정 혹은 국내문제 불간섭 원칙을 얘기할 때도 비슷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가정폭력에서 “가정”의 영어 표현이 “Domestic”인데, 국내문제 불간섭에서 “국내”의 영어 표현 또한 “Domestic”으로 동일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부가 “자국민”이었던 유대인들까지 민족적, 종교적 이유로 집단 수용하고 박해하고 학살했던 홀로코스트의 기억은, 국가 간의 문제만을 다루며 “국내” 문제를 방치했던 국제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1945년 유엔 헌장과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필두로, 국적국이 자국민을 다루는 인권 보호의 문제를 더 이상 국내문제가 아닌 국제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인권보호의 문제는 인류보편 가치의 문제로 간주되며, 내정 불간섭 내지 국내문제 불간섭 의무의 범위 밖에 위치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오히려 인권 문제는 원칙적으로 제3국인 다른 나라들도 열심히 관심을 가지고 건설적 비판과 제언들을 적극적으로 개진할 필요가 있는 “대세적 의무(Obligations erga omnes)”의 대상이 되었다. 즉, 관련국은 자신의 인권 보호 의무를 단순히 개인에 대해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대상으로 부담하며, 따라서 국제공동체 일원인 다른 국가들도 누구나 관련 사안에 대해 적절히 문제 제기할 법적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수년 전 미얀마 로힝야 난민 사태에 대해 저 멀리 감비아가 국제사법재판소에 문제 제기하고, 최근 팔레스타인 무력충돌에 대해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제노사이드 혐의로 제소한 것들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의 행동이다.

물론 그 나라 고유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존중할 필요가 있으며, 내부에서 자발적 상황 개선이 일어나길 측면에서 응원하며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한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알려진 상황이 홀로코스트처럼 당장 매우 심각하다면, 그땐 매서운 비판과 함께 구체적 해결 방안을 함께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나, 어떤 나라나, 완벽한 상황에 있을 순 없으므로, 상호 건설적 대화·비판이 있을 시 필요하면 서로 협력하며 겸허히 각자의 부족한 부분들을 메꾸려는 노력들이 중요하다. 혹 특정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남의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면, 이는 수시로 태도 변화가 가능할 것이고 폭넓은 지지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급적 인권 문제는 일관된 원칙과 진정성을 가지고 꾸준히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문 금지에도 목소리를 내야 하겠지만, 식량난에 허덕이는 주민들의 식량권과 건강권도 함께 외치며 구체적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주민 “방임”에 대한 지적은 애써 외면한 채 인도적 지원만을 추진해서도 안 될 것이며, 구금시설에서의 구타 방지를 위한 노력을 평가하고 필요한 기술협력을 제공할 의사는 없으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만 하는 것도 실질적 인권 개선을 위한 진정성 있는 노력이라 평가하기에 부족할 것이다.

평화와 통일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북핵과 북한인권 문제도 마찬가지이고, 자유권과 사회권(생존권), 건설적 대화와 인도적 지원도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다. 얼마 전 7월 14일 북한이탈주민의 날을 맞아 아프리카의 케냐와 가나에서 의미 있는 세미나가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생경한 그곳에서 울려 퍼진 목소리가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자유가 있다.”

※ 평화통일 칼럼은 『평화통일』
기획편집위원들이 작성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