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과 공존하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일고(一考)
‘소박한 실재론’을 넘어,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존의 언어 찾기
“만약 내가 세계 평화와 사회적 화합에 가장 큰 장애물 후보를 하나 골라야 한다면,
그것은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이다.” 1)
1) 조너선 하이트, 『행복의 가설: 고대의 지혜에 현대 심리학이 답하다』 (안양 : 물푸레, 2010), p.136.
한국에서는 베스트셀러 『바른 마음』의 저자로 알려진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의 말이다. 그의 이러한 통찰에 비추어보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합을 가로막은 가장 큰 장애물 역시 소박한 실재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소박한 실재론이란 무엇이며, 왜 그것이 평화의 걸림돌이 되는가? 이 글에서는 먼저 소박한 실재론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실천적 대안으로서 사회적 대화의 가능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
소박한 실재론은 세상 모든 사람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치 디지털카메라가 피사체를 왜곡 없이 충실하게 담아낸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때 디지털카메라가 어느 회사 제품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A사의 카메라든, B사의 카메라든 같은 피사체를 찍었다면 그 결과물도 동일할 것이라는 믿음처럼, 내가 바라보는 세상과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동일할 것이라는 믿음이 소박한 실재론의 출발점이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세상을 본다고 느낄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1) 자신이 세상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으며, (2) 다른 사람들도 정상적이라면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볼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나와 다르게 본다면, 그 사람은 무지하거나, 감정적·이념적으로 편향되었거나, 심지어 나쁜 의도를 가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하이트가 주목한 소박한 실재론의 파괴적 위험성이다. 소박한 실재론이 평화를 가로막는 이유는 ‘현실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아예 해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왼쪽의 상단 첫 번째 그림에서 많은 사람은 가운데 글자를 ‘13’으로 인식할 것이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많은 사람이 같은 글자를 ‘B’로 읽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그림에서 가운데 글자는 무엇일까? 정답은 ‘둘 다’이다. 숫자의 맥락에서는 ‘13’으로, 영어의 맥락에서는 ‘B’로 보이는 것이 가운데 글자의 본질적 속성이다. 즉, 어떤 대상이 어떻게 보이느냐는 대상이 제시되는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13인가? B인가? 같은 현실도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며, 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갈등과 오해를 낳는다는 것이 소박한 실재론의 위험성이다.
숫자의 맥락에서만 그림을 본 사람은 가운데 글자를 ‘13’으로 인식하고, ‘B’라고 읽는 사람을 비논리적이거나 비정상적이라고 여긴다. 반대로 영어의 맥락에서만 그림을 본 사람은 그것을 ‘B’로 받아들이고, ‘13’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을 무지하거나 심지어 악의적인 존재로 간주한다. 이처럼 자신의 관점이 유일한 진실이라는 믿음이 서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갈등과 오해를 낳는 것, 조너선 하이트가 경고한 평화를 가로막는 핵심 메커니즘이 바로 여기에 있다.
소박한 실재론과 한반도 문제
“북한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북한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북한에 대한 인식은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의 출발점이다. 북한을 위협적이고 적대적인 존재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협력 가능한 상대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남북관계를 대하는 태도와 통일을 향한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을 단순히 협력 혹은 적대라는 이분법적 틀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북한은 협력의 대상인 동시에 적대의 대상이다. 남한과 북한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보면 북한은 분명 협력하고 함께 가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분단 현실과 군사적 대치라는 안보의 맥락에서 보면, 북한은 부정할 수 없는 안보 위협이자 적대의 대상이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 이래 역대 모든 정부는 북한을 협력의 대상이자 경계의 대상이라는 이중성을 인정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2002년 통일교육지침』에서 “우리가 북한을 바라볼 때는 군사적으로 대결상태에 있는 경계대상이라는 점과 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해서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할 동포라는 이중적인 측면이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윤석열 정부 역시 『2023년 통일교육 기본방향』에서 “북한은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경계의 대상이면서 함께 평화통일을 만들어 나가야 할 협력의 상대이다”라고 제시하였다.
남남갈등의 지난 80년 역사는 북한에 대한 시각과 접근 방식의 차이가 빚어낸 갈등의 역사였다. 북한을 협력의 대상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적대의 대상으로 봐야 하는가를 둘러싼 양자택일적 갈등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북한을 위협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협력을 주장하는 쪽을 현실을 외면한 이상주의자로 비난해왔으며, 북한과의 협력을 강조하는 사람은 경계심을 드러내는 쪽을 냉전적 사고에 갇힌 집단으로 폄하해왔다. 자신의 시각만이 옳고 상대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소박한 실재론이야말로 한반도 갈등이 반복되는 근본 원인 중 하나다.
소박한 실재론의 관점에서 보면, 양측 모두 자신이 보는 북한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믿고 있으며,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비정상적이거나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즉, 두 집단 모두 같은 인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북한은 그 어느 한쪽으로도 단순히 규정할 수 없는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소박한 실재론과 사회적 대화
그렇다면 한반도 문제에 관한 소박한 실재론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는 그 해답을 사회적 대화를 통한 진보와 보수 간의 ‘합의’에서 찾고자 했다.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인식의 차이를 조율하고 공통된 비전을 도출하기 위해 추진된 통일국민협약(안)은 그 시도의 결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림 속 글자를 ‘13’ 또는 ‘B’로 합의한다고 해서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글자의 이중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북한을 ‘협력의 대상’으로만 혹은 ‘적대의 대상’으로만 정의하거나 합의한다고 해서, 협력과 적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북한의 이중적 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
합의를 통한 이중성과 모순의 해결은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우리는 종종 ‘합의를 통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기대를 갖는다. 이러한 기대는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것처럼, 복잡하고 모순적인 문제를 하나의 선택으로 간단히 정리해 버리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갈등이 길어지고 심화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빠른 합의를 갈망하게 된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이 갈등을 언제 끝낼 수 있을까’가 우선되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을 외면한 합의는 갈등이 사라졌다는 착각만 제공할 뿐, 실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의 본질을 외면한 합의는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반증에 불과할 뿐이다.
소박한 실재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합의가 아닌 인정이 필요하다.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가? 일차적으로는 “‘13’인가? ‘B’인가?”의 선택이 아닌, ‘13’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하다는 모순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있는 그대로 북한을 보고 있다’는 믿음 자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의 경험, 나의 지식, 정체성, 그리고 이념이 북한을 해석하는 데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나의 북한관은 언제든지 부분적이고 왜곡될 가능성을 가진 해석이라는 점에서 겸손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의 전환을 통해 우리는 상대 역시 나와 같은 조건에서 북한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상대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 수 있다.
이재명 정부의 사회적 대화는 또 다른 ‘합의’의 도출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서로 다른 인식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무지나 나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정당한 현실 해석의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는 대화를 설계해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합의 이전에 차이를 드러내고, 그 차이와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한다. 이러한 대화는 단순히 ‘나도 옳고 너도 옳다’ 또는 ‘나도 틀렸고 너도 틀렸다’라는 양시론과 양비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반도 문제의 복잡성과 이중성, 모순성에 대한 성찰과 나의 인식이 언제든지 부분적이고 편향될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그 한계를 마주할 용기를 의미한다.
“명백한 모순과 공존하는 능력이 갈등 전환의 핵심이다.” 2)
2) 존 폴 레더락, 『갈등 전환, 갈등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 (논산, 대장간, 2014), p.81.분쟁 현장에서 평화의 길을 찾은 실천가로 알려진 존 폴 레더락의 주장이다. 민주평통의 사회적 대화는 하나의 현실 인식, 하나의 북한 인식만 가능하다는 소박한 실재론을 내려놓고, 상충되는 해석과 감정이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민주평통의 사회적 대화는 모순을 지워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모순을 안전하게 드러내고 함께 견디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민주평통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