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10 Vol.217

분단의 최전선 접경지역 주민들이 말하는 변화

접경지역의 오늘, 확성기가 멎자 들려오는 삶의 이야기

대북·대남 확성기 방송이 중단된 지 2개월, 접경지역 주민들은 비로소 조용한 밤을 되찾았습니다. 그러나 긴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탱크와 대포 소리, 오물풍선, 대남방송의 굉음은 여전히 주민들의 일상 깊숙이 남아있습니다. 민주평통은 접경지역을 대표하는 강화·김포·철원의 주민들을 초청해, 그들의 삶 속에 각인된 분단의 현실과 평화의 의미를 묻는 좌담회를 마련했습니다. 이날 좌담에는 ▲전영선 건국대 교수(사회), ▲김경호 강화섬김치 대표(인천 강화군), ▲조민재 김포역사문화연구소 소장(경기 김포시), ▲신혜정 접경지역주거환경연구소 소장(강원 철원군)이 참여했습니다.

▲김경호 강화섬김치 대표 ▲신혜정 접경지역주거환경연구소 소장 ▲조민재 김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전영선 건국대 교수
4인 좌담

DISCUSSION

탱크와 대포 소리를 새소리처럼 듣던 어린 시절

사회자

먼저, 접경지역에서 살아오신 경험을 중심으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신혜정

저는 철원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어릴 적 제 일상은 늘 탱크와 대포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밤이면 불빛 하나 새어나가지 못하게 통제됐고, 귀를 파고드는 대남방송이 공기처럼 깔려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잠시 살다가 다시 철원으로 돌아왔을 때, 조용한 밤의 공기가 얼마나 낯설던지요. 철원은 낮과 밤이 다릅니다. 낮에는 탱크가 도로를 막고 지나가며, 대포 소리에 건물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그 소리를 마치 새소리처럼 들으며 자라왔습니다.

조민재

저는 김포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삐라를 줍던 경험입니다. 김포는 삼면이 철책으로 둘러싸인 땅입니다.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며 그 감각이 무뎌졌지만, 외곽으로 나가면 언제든 철책선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늘 분단의 현실을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김경호

강화는 청정 농업지역이자 관광지입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가장 먼저 불안을 체감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농사철에는 차량 이동 제한으로 비료 운반조차 어려워지고, 농민들의 경제적 피해도 큽니다. 주민들은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때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생기나’ 하는 걱정을 먼저 하게 됩니다.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린 오물풍선과 대남방송

사회자

최근 1년 동안 북한의 오물풍선과 대남방송이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었습니다. 체감하신 사례가 있으실까요?

신혜정

저희 마을 후방 논에도 오물풍선이 떨어졌습니다. 쓰레기봉투가 터져 농기계로 갈아 없앴는데, 이후로 불안감이 컸습니다. 대남방송은 주민들이 ‘귀신 소리’라 부릅니다. 웅웅 울리는 소리에 불면증에 시달린 이웃이 많았고, 식당 앞에 풍선이 떨어져 하루 장사를 못한 분도 있습니다.

조민재

김포는 인구가 5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변했지만, 오물풍선은 여전히 불안을 안겨줍니다. 김포공항 인근에서는 자동차 부품 공장에 떨어진 풍선 때문에 화재가 발생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물풍선은 주민들의 안전까지 위협합니다.

김경호

강화는 피해가 가장 극심했습니다. 새벽마다 들려오는 대남방송 소리에 주민들이 잠을 이루지 못했고, 아이들은 불안으로 병원 진료가 잇따랐습니다. 가축도 굉음에 놀라 사료를 먹지 않아 농가가 큰 피해를 봤습니다. 일부 가정에는 방음장치가 설치됐지만, 주민 모두를 보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새벽에 울려 퍼지는 대남방송 소리는 귀신 소리 같았습니다.
아이들도 잠을 못 잤고, 가축들도 사료를 거부했습니다.
- 김경호 강화섬김치 대표

대남방송이 멈추고 되찾은 조용한 밤

사회자

새 정부 출범 이후 가장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가 대남방송 중단인데요. 남북관계 개선의 모멘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옵니다. 실제로 체감하신 변화가 있으신가요?

김경호

대통령 취임 직후 우리가 방송을 중단하자 북한도 곧바로 멈췄습니다. 그 순간, 곧장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이전에는 방송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주민도 있었고, 민원이 끊이지 않았는데 소리가 사라지니 민원이 확 줄었습니다.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조민재

지금의 평온함이 앞으로도 이어져 남북이 평화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시적 변화가 아니라, 지속되는 평화의 흐름으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것이죠.

신혜정

철원은 대남방송이 사라지자마자,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겪었던 불안한 일상이 순식간에 회복됐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감을 되찾으니, 무엇보다도 잠이 잘 옵니다. 그게 가장 큰 변화입니다.

농민들은 새벽 네 시에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직장인들과는 생활 패턴이 다르죠. 그래서 밤 8~9시에는 잠들어야 하는데, 그 시간에 대남방송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져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자고 싶을 때 자고, 깨고 싶을 때 깰 수 있습니다. 덕분에 몸도 마음도 에너지가 충전되고,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주민들이 느끼는 가장 큰 평화가 아닐까요.

접경지역 협의회들이 서로 교류하고 연대해 활동해야 합니다.
작은 행사라도 이어가는 것이 평화의 불씨를 살리는 일입니다.
- 조민재 김포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접경지역은 규제와 기회의 땅

세 토론자는 입을 모아 접경지역의 자연환경과 역사·문화자원을 큰 자산으로 꼽았다. 그러나 동시에 군사보호구역, 개발 제한, 도로 인프라 부족 등으로 발전 기회가 제약받고 있음을 지적했다.

사회자

접경지역에서 사는 장점은 무엇이며, 그것이 지역발전이나 남북관계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조민재

김포는 풍부한 문화유산과 지리적 이점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책과 각종 규제로 이를 충분히 활용하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역사 자원을 스토리텔링하고 교류의 거점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신혜정

철원은 넓은 농토를 보유하고 있지만, 도로가 확충되지 않아 농산물 이동이 어렵습니다. 주민들의 생활 기반을 안정적으로 지탱하기 위해서는 교통망 확충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김경호

강화의 장점은 잘 보존된 자연환경과 농사짓기에 좋은 토양입니다. 또한 군사 분계선 근처라는 특수성 때문에 역사·안보 관광 자원이 많아 관광 산업의 잠재력이 큽니다. 그러나 빠르게 인구가 유출되고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지역이 활력을 잃고 있습니다. 지역 특산물 판매와 가공시설을 확충하고 청년 유입을 촉진해 정착 여건을 개선해야 합니다.

내부 갈등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선책은 교육과 체험

사회자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남남갈등, 남녀갈등이라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쓰일 만큼 사회적 분열이 심각합니다. 내부의 화해와 이해를 넓히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김경호

바닷가를 따라 이어진 철책선 구간을 산책로로 조성하면 주민들이 경쟁심이 아닌 평화와 연대를 체감하는 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강화에서 걷기 대회를 추진한 바 있는데, 이처럼 정부와 지자체가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이면 지역민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입니다.

신혜정

과거에는 ‘우리의 소원’ 노래를 무의식적으로 부르며 자랐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분단, 통일에 대한 개념이 우리 세대보다 훨씬 막연합니다. 저는 아이들이 직접 민통선 안에 들어가 보고, 현장을 체감하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통일교육을 학교 필수 이수 과목으로 편성하고, 정부와 지자체가 안전한 체험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조민재

김포는 평균 연령이 40대 초반인 젊은 도시이며, 인구의 90% 이상이 외부에서 유입된 주민들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기성세대식 이념 교육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청소년을 중심으로 가족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평화·안보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김포 장릉과 철책선 주변에는 역사적 자원이 풍부합니다. 한강과 임진강이 하나였던 시절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공감할 때, 통일의 필요성과 평화·교류·협력의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평화누리길’에서 ‘협력의 길’까지

사회자

지역 주민들이 가진 자원과 가치를 매개로 서로 소통하며 평화통일로 연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렇다면, 지자체 차원에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정책이나 방안이 마련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조민재

김포는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접경지역으로서의 특성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 교류의 거점도 있었지만, 지금은 철도 문제 등 수도권 현안에 밀려 아쉬움이 큽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정책 방향이 달라지는 것도 제약 요인입니다. 지역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지만, 한계를 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김경호

강화에는 교동과 같은 넓은 땅이 있습니다. 그곳에 공장을 세우고, 장차 북한 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구상도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땅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남북이 함께 활용하고 공동 번영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조민재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은 지난 10여 년간 평화누리길을 기반으로 캠페인과 행사를 운영해 왔습니다. 김포의 경우, 철책선 아래 담장에 벽화를 그려 시민들이 평화의 의미를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 북한이탈주민과 다문화 가정을 위한 행사, 지역 탐방 프로그램, 자원봉사 활동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포·강화·파주와 서울 강서구까지 하나의 문화권역으로 연결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자원이 많습니다. 이를 민주평통이 적극적으로 매개해 준다면 효과가 클 것입니다.

한번은 부산 연제구와 상호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여기가 북한과 불과 1.4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며 분단 현실을 체감했습니다. 같은 접경지역이라도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에, 철원·강화·연천 등 접경지역 협의회가 돌아가며 상호 방문하고 활동을 공유한다면 그 의미가 클 것입니다.

신혜정

철원에서는 DMZ 마라톤 대회와 음악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그러나 협의회 차원에서 직접 연계해 추진하는 사업은 아직 부족합니다. 파주 임진각에서 시작해 철원 중간 지점에서 걷기대회를 함께 열었던 경험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접경지역 협의회들이 힘을 모아 행사를 공동으로 진행하고 서로 성과를 공유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뢰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평화의 가치를 배우는 미래

사회자

접경지역 주민으로서 남북관계에서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김경호

강화, 김포, 철원 세 지역 협의회가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결국 한결같이 대북방송 중단의 필요성이 대두됩니다. 접경지역 주민들은 그만큼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일상의 피해가 누적되고 있는 만큼, 정부와 지자체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민주평통이 화합의 분위기를 이끌며 지역의 목소리를 전달해 주기를 바랍니다.

조민재

바람이라면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겁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평화 교류가 활발해지기를 오랫동안 바라왔습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는 건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역 협의회 차원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평화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문위원들이 연대하고, 활동이 언론과 중앙에 알려질 때 정부도 주민들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거시적인 정책 변화까지는 당장 어렵더라도, 지역이 주체가 되어 실천적인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야 합니다.

신혜정

철원에서는 최근 대북전단 살포를 막기 위해 행정명령과 단속을 강화했습니다. 의심 차량을 사전에 차단해 주민들의 불안감을 줄인 것은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싸우지 않고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예산이 걸림돌이지만, 접경지역 협의회들이 힘을 모아 행사를 공동으로 추진하며 북한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이들부터 차근차근 교육해야 합니다. 북한을 직접 보고 느끼며 평화의 가치를 배우는 경험이 아이들의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고, 이는 결국 그들이 만들어갈 미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북한을 직접 보여주고 체감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민주평통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 신혜정 접경지역주거환경연구소 소장

오늘의 일상에서 내일의 희망으로

이번 좌담회에서 접경지역 주민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지역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시대적 과제를 다시금 일깨웠습니다. 탱크와 대포 소리를 일상처럼 견뎌온 세대, 오물풍선과 확성기 소음 속에도 꿋꿋이 삶을 이어온 주민들에게 평화란 멀리 있는 거대 담론이 아닌 ‘오늘의 일상’이자 ‘내일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화가 곧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밤이며, 아이들이 두려움 없이 뛰놀 수 있는 마을이고, 분단의 상처를 넘어 지역이 함께 번영할 수 있는 길임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민주평통이 지역의 다양한 자원과 주민들의 목소리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며, 작은 활동이라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날 좌담이 보여주었듯, 평화는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하고 만들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접경지역 주민들의 목소리가 확산되고, 그들의 경험이 모두의 공감과 연대로 이어질 때, 한반도의 평화는 한 걸음 더 가까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