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9+10 Vol.217

‘월경(越境)’의 다큐 <수프와 이데올로기>

영화 속 제재, 인물, 언어·문화적 요소의 탈경계성

<수프와 이데올로기(Soup and Ideology)>(2022)는 재일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온 양영희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영화이다. 다큐멘터리영화 <디어 평양>(2006)과 <굿바이 평양>(2011), 극영화인 <가족의 나라>(2012)에 이어 오랜만에 내놓은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녀는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상,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감독상, 대종상영화제 다큐멘터리상, 들꽃영화상 대상 등을 수상하며 더욱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데에는, 작품 속 제재, 인물, 언어·문화적 요소를 활용하여 탈경계적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였다는 점이 주요인으로 자리한다.

수프와 이데올로기
Soup and Ideology(2022)

개봉

2022-10-20

감독

양영희

출연

최강정희, 양영희, 아라이 카오루

개인의 인생사를 통한 한국 근현대사의 반추

<수프와 이데올로기>에는 양영희 감독의 모친인 강정희 여사가 노년을 보내는 순간순간이 포착되어 있다. 영화는 80대 중반을 넘긴 그녀의 기억에 잔존해 있던 제주 4.3사건(1948)을 둘러싼 아픈 기억을 기록한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1930년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나 제주도 출신 부모님 슬하에서 지내다가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로 피신하여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몇 년 후 발생한 4.3사건으로 약혼자와 친척들을 잃고 두 동생과 함께 밀항선에 올라 또다시 일본에서 살게 된 강정희 여사의 인생사를 소개한다. 이후 그녀는 같은 제주도 출신인 양공선 옹을 만나 22세에 결혼하고 58년을 동고동락하다가 2009년에 남편과 사별하는데, 영화 초반에는 양공선 옹의 말년 모습이 담긴 영상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오사카에 터를 잡은 이들 부부는 조총련 활동에 열성적이었고, 결국 차례로 낳은 세 명의 아들들 모두를 1970년대 초 북송선에 태워 보내고 만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이처럼 기구하게 이어진 강정희 여사의 인생사를 담담히 전달한다. 그럼으로써, 외세의 침탈 및 남북 분단과 이념 대결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를 반추시킨다.

주요 인물을 통한 세대와 민족 간 장벽의 해소

<수프와 이데올로기>에는 강정희 여사와 더불어, 여사의 딸이자 이 작품의 감독인 양영희와 그녀의 결혼 상대자이면서 영화의 프로듀서로도 참여한 현직 기자 아라이 가오루(荒井カオル)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강정희 여사가 반복적인 만남과 교감을 거쳐 사위를 맞이하고 한국 정부의 초청에 따라 자신의 딸 부부와 함께 제주도를 방문하는 일련의 여정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양영희 감독은 4.3사건을 둘러싼 인식을 바탕으로 북한을 선택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북으로 보낸 부모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된다. 또한 아라이 가오루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자신의 아내를 따라 강정희 여사를 ‘어머니’로 부르고 기꺼이 가족의 일원이 되어 준다. 그리하여 영화 속 세 명의 주요 인물은 세대와 민족의 차이로 인한 마음의 장벽을 해소하고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난다.

일상 언어와 생활 문화를 통한 소통의 가능성 제시

세대 및 민족 간의 장벽을 해소함에 있어,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정치·외교적 이슈나 이에 관한 거대 담론을 끌어오기보다는 인간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작용하는 일상 언어와 생활 문화를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먼저,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이나 시공간적 지표, 역사적인 사건 등을 나타내는 자막이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 대신에 화면 속 인물들의 대화나 인터뷰, 감독의 목소리가 들어간 내레이션 방식의, 대체로 일본어로 된 일상적 음성 언어가 주를 이룬다. 이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변화 양상을 지목할 만하다. 강정희 여사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영화 중반 지점을 기준으로, 이전까지는 양영희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화면 밖에 위치한 채 주로 인터뷰 진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데 반해 이후부터는 화면 속으로 들어가 직접적인 등장인물로 거듭난다는 점이 그것이다. 다음으로, 영화에는 ‘삼계탕’이라는 한국의 전통 음식을 매개로 일본인 아라이 가오루가 강정희 여사와 친밀함을 더해가며 정을 쌓은 뒤 한국의 전통 의상인 한복을 입고 양영희 감독과 결혼함으로써 가족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생활 문화의 공유를 통해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 간 충분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제목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