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얼빈> 속 역사 재현의 양상
하얼빈에서 피어난 혁명:
안중근과 동지들의 외침
해방 후 남한에서 개봉된 첫 번째 극영화인 <의사 안중근>(이구영 감독, 1946)을 필두로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감독, 1946), <의사 안중근>(주동진 감독, 1972), <도마 안중근>(서세원 감독, 2004)에 이르기까지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다룬 영화의 타이틀에는 하나같이 그의 이름이 삽입되어 있다. 심지어는 1970년대 말에 만들어진 북한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엄길선 감독, 1979)에서도 유사성이 나타났다. 이들 작품은 공통으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을 전후한 안중근 의사의 전기(傳記)적 삶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경향은 비교적 최근에 나온 뮤지컬 영화 <영웅>(윤제균 감독, 2022)으로도 이어진 바 있다.

‘안중근 전기’로부터 탈피한 구한말 독립투쟁의 서사
그리고 2024년 12월 24일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이 개봉됐다. 역사적 실존 인물인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된 실제 사건을 담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 역시 또 한 편의 ‘안중근 영화’로 일컬어질 만하다. 그러나 제목 자체에 반영되어 있듯, <하얼빈>의 경우 안중근을 다룬 기존의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이야기 구조를 채택한다. ‘의사 안중근’이 아닌 ‘장군 안중근’을 묘사하려 했다는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이 작품에서도 안중근(현빈 분)이 주인공으로는 등장하지만 그 비중이 절대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이에 따라 빈번히 클라이맥스를 장식해 온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은 매우 간결하게 제시되어 있을 뿐이며 그의 재판 장면은 아예 설정조차 되어 있지 않다. 대신에 영화는 우덕순(박정민 분) 및 김상현(정우진 분), 이창섭(이동욱 분) 등 대한의군 참모중장인 안중근의 동지들과 최재형(유재명 분)이나 공 부인(전여빈 분) 등의 조력자를 통해 구한말 한반도 북방과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전개된 무장 독립투쟁을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가미된 허구성을 상쇄시키는 극사실적 영상 화면
그렇다고 <하얼빈> 속 독립투쟁의 서사가 역사적 사실에 철저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주요 배역 가운데 김상현, 이창섭, 공 부인, 그리고 모리 다쓰오(박훈 분) 등은 작가적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캐릭터에 해당한다. 이들은 극 중에서 안중근과 다양한 관계망을 형성한 채 강경파 동료(이창섭), 한때의 밀정(김상현), 여성 조력자(공 부인), 반인도적 성향의 일본군 장교(모리 다쓰오) 등으로 등장하며 그가 거사(巨事)를 치르는 데 공조 또는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이야기 스펙트럼이 확대되고 극적 긴장감이 고조되는 효과가 발생하기도 하나, 서사적 개연성 및 역사적 고증을 둘러싼 문제가 야기될 소지도 다분히 존재한다.
이에 영화는 영상 화면에 극도의 사실성을 가함으로써 가상의 인물형과 가공적 사건들에 의해 가미된 작품의 허구성을 상쇄시킨다. 살육으로 얼룩진 잔인한 전투 장면의 노골적인 묘사, 명암의 대비를 통한 그로테스크적인 입체감의 창출, 스테디캠이나 드론 장비를 활용한 시계(視界)의 다각화, 국내뿐 아니라 몽골, 라트비아에서의 로케이션 촬영에 따른 현장감의 확보 등은 이를 위해 취해진 표현 기법상의 전략 및 그 가시적 성과로 볼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역을 일본의 유명 배우 릴리 프랭키(Lily Franky, 中川雅也)가 연기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에 따라 <하얼빈>에서는 국권 침탈 직전의 암울한 시대상과 한반도 이북 지역의 혹독한 맹추위, 의병 대원들이 처한 열악한 주변 환경 등이 공감각적으로 전달된다. 또한 이로써, 영웅적인 모습에 가려져 온 안중근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나기도 한다.
영화의 시사점, 그리고 시대적 함의
영화의 특징은 1909년 1월 17일 러시아 연추를 배경으로 한 대한의군 회의 장면으로 구성된 첫 부분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안중근은 40일 전 함경북도 경흥에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만국공법’에 따라 모리 다쓰오를 포함한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했는데, 그들의 역습으로 부대원들 대부분을 잃고 가까스로 살아남아 귀환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안중근은 이창섭을 위시한 동료들에게 강하게 비판받는데,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되 반격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다. 이후에도 국권 회복과 동양 평화를 향한 안중근의 굳은 신념과 의지뿐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만한 고뇌와 불안감, 지침과 나약함 등이 직간접적으로 표출된다. 끝에 이르러서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교수형 집행을 앞두고 긴장과 공포를 느끼는 안중근의 생애 마지막 모습이 화면에 전시되기도 한다.
주목되는 점은, 바로 뒤에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리 다쓰오를 처단하고 밀정의 굴레를 벗어던진 뒤 우덕순, 공 부인과 길을 떠나는 김상현의 자태가 마지막을 수놓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영웅적 위인으로 남아 있는 안중근이라는 실존 인물과 범인(凡人)을 대변하듯 일제의 탄압과 유혹에 굴복하기도 한 가상의 인물 김상현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 간다. 더불어 ‘첩보 블록버스터’나 ‘심리 스릴러’ 등에서의 장르적 연출 방식을 결합하면서 <하얼빈>은 490만여 명의 관객 동원 수를 기록하게 됐다.
<하얼빈>의 감독 우민호는 <남산의 부장들>(2020)을, 제작사인 하이브미디어코프는 <서울의 봄>(2023)을 만들어 대중성과 작품성 양면에서 성공을 거둔 바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두 영화 모두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10.26 사건)’을 다뤘다는 사실이다.
안중근의 거사가 행해진 하얼빈(哈爾濱)에서 동계 아시안게임이 개최될 만큼 많은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기는 했으나, 영화 <하얼빈>은 특정한 영웅적 인물에 의존하기보다는 논쟁과 대립이 있더라도 힘을 모아 함께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116년 전 안중근을 비롯한 대한의군 대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