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3+04 Vol.214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역사적 공간
‘장충단공원’

평화통일을 향한 정신···민주평통이 이어가다

장충단공원은 조선 말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선말 충신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장충단에서 일제강점기, 6·25전쟁,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 온 이 공원의 역사는 그 자체로 한반도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공원 내 기념물들은 이곳이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 역사적 성찰과 교훈을 제공하는 공간임을 증명한다. 장충단공원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며, 이곳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본다.

1923년 장충단공원의 전경사진으로 뒤쪽에 보이는 원형 경기장은 장충단공원 운동장이며 지금의 장충체육관 자리에 해당한다. ⓒ우리역사넷
“난리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죽은 자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 보답하는 것은 귀신을 위안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다. 갑오년(1894년) 이후로 전사한 사졸(士卒)들에게 미처 제사를 지내주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생각건대, 원한 맺힌 혼령들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어 슬프게 통곡하는 소리가 구천에 떠돌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짐(朕)의 가슴이 아프다. 제사 지내는 일을 원수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고종실록> 40권

장충단의 시작: 조선 최초의 현충원

1900년에 고종 황제는 갑오년(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년(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순국한 대신과 장졸을 기리기 위한 ‘장충단 건립을 위한 소칙’을 원수부(元帥府, 국방부)에 내린다. 원수부는 1900년 11월 10일 현재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어영청 분영인 남소영(南小營) 터에 제단(祭壇)과 건물을 짓고 ‘장충단(奬忠壇)’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운다. 당시 장충단은 15칸의 건물과 3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장충단(奬忠壇)이라는 이름은 ‘충성스런 장수를 위한 제단’이란 뜻인데, 비의 정면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장충단(奬忠壇)’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1861~1905)이 지은 14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다음 해인 1901년 장충단은 임오군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 당시 순국한 신하들의 신위를 함께 모시면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충신들을 기리는 ‘추모공간’으로 바뀌게 된다.

제사는 매년 4월 15일과 10월 15일에 지냈는데, 군기·군악대가 동원되고 각부 대신과 군부대신 이하 각 위관(尉官)과 병졸들이 참석하여 순국선열을 기리며 엄숙한 분위기에서 행사가 진행됐다. 장충단공원의 명칭은 ‘장충단(奬忠壇)’으로서 이곳은 사실 고종황제가 세운 대한제국 최초의 국립현충원이었다.

‘추모공간’에서 ‘위락(慰樂)공간’으로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순국과 저항의 상징인 장충단 제사를 폐지한다. 그리고 물이 맑고 경치가 좋았던 이 일대를 1919년 9월 ‘경성 도시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대규모 공원으로 변모시킨다. 벚나무를 심고 연못을 만들고 산책로, 운동장, 잔디밭, 공동화장실 등을 만들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자 서울 시민들의 산책지, 각종 사회단체의 운동회 및 야유회가 개최되는 곳, 청소년들의 야외 체력단련 장소 등으로 이용하게 한다.

당시 장충단공원의 영역은 지금의 국립극장, 반얀트리클럽, 한국자유총연맹, 장충체육관을 아우르는 것으로 1940년 기록에 의하면 공원 전체 면적은 무려 41만 8천 평이었다고 한다. 특히, 장충단공원에 운동장, 양궁장, 자전거 경기장, 스모 경기장 등을 추가로 건설하고 일본정신박람회를 개최해 조선인을 신민화(臣民化)하는 장소로 이용한다.

후에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는 정치 유세 현장으로도 많이 쓰였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당시 김대중 후보와 박정희 후보가 벌였던 유세대결이 유명하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장충단비’뿐이다. 1969년에 지금의 수표교 서편으로 옮긴 ‘장충단비’는 공원 한구석에 쓸쓸히 놓여 있다.

장충단 비문을 쓴 민영환,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장충단 건립 취지 ⓒ소셜포커스

자유와 독립을 향한 굳은 신념의 발자취···애국정신의 성지

1970년대 이후 장충단의 원래 의미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고, 장충단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호국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장충단공원에서 동국대학교 방면으로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이준 열사와 이한응 열사의 동상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다.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는 3·1운동 이후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평화회의에 전국의 유림들이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세계만방에 알렸던 일을 기념하여 만든 조형물로, 1972년 10월 10일에 세워졌다. 이준 열사(1859~1907)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에 통분하여 현지에서 순국했다. 1964년에 건립된 이준 열사의 동상은 오른손을 주머니에 깊게 찔러넣고 왼손에는 두루마기 문서를 하나 든 채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이한응 선생(1874~1905)은 용인 출신으로 일찍이 영어와 신학문을 배우고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05년 한일협약과 영일동맹 등으로 한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일 것이라는 절박함에 30대의 젊은 나이에 영국에서 자결 순직했다. 1960년에 건립된 기념비는 높이 3m 규모로 거북 형상의 받침돌 위에 비석이 올려져 있는 모양이다.

3개 기념물을 지나 동국대 후문으로 가는 돌계단 위에는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가 있다. 외솔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고초를 당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 운동의 대표주자다. 1937년에는 우리말본 출판을 통해 국어 문법 체계를 최초로 정립하기도 했다. 이 기념비는 선생의 사후 1년이 지난 1971년 5월 세종대왕의 생일을 기해 세워졌다.

이어 장충단공원에서 국립극장 방향으로 가면 유관순 열사 동상과 3·1독립운동기념탑을 마주하게 된다. 유관순 열사 동상은 1970년 남대문 앞 녹지대에 건립했던 것을 1971년 현재(서울시 중구 장충단로 101 남산공원 내) 위치로 이전하면서 장충단공원을 애국정신의 성지로 만들었다. 동상은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동상 기둥엔 남녀 독립운동가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거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밧줄에 묶인 모습 등 6개의 부조(浮彫)로 그려졌다.

국립극장 아래 작은 공원에 세워져 있는 3·1운동기념탑은 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제50주년 기념일에 착공하여 3·1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 준공했다. 탑의 높이는 19m 19cm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났던 해인 1919년을 의미한다. 기념탑에는 하늘, 땅, 사람(天地人)과 천도교, 기독교, 불교 연합을 상징하는 3개의 기둥 축을 세워 하늘 높이 비상하는 삼태극(三太極, 우주)을 원구 형태로 구성하고, 제일 꼭대기에는 동서남북을 조형화해 우주로 힘차게 비상하는 민족을 담았다. 탑의 앞면에는 3·1독립선언서 원문이 새겨져 있고, 탑의 뒷면에는 3·1독립운동의 모습을 부조로 새겨 놓았다. 좌측에는 민족수난과 투쟁을 의미하는 조각상을, 우측에는 평화와 민족의 영광을 의미하는 상을 세웠다. 탑의 뒷면 부조에는 일제의 총 칼 앞에서 굴하지 않고 독립을 외쳤던 우리 선조들의 항거 장면을 담았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때 장충단공원에서 약 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김대중 후보와 박정희 후보가 유세대결을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역사넷
비석의 앞면 글씨는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이, 뒷면의 비문은 원수부 회계국 총장이었던 민영환(1861~1905년)이 지었다.
3·1독립운동 기념탑 건너편에 있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

한반도 평화통일, 민주평통이 이어가다

그리고 3·1독립운동기념탑 건너편에는 ‘평화통일비’가 세워져 있고, 그 위에 민주평통 사무처가 있다. 현행 헌법 제92조에 의해 설치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1981년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만들어진 ‘통일자문회의’가 전신으로 그동안 평화통일에 관한 국민적 합의와 범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고 평화통일정책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고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해왔다. 현재 민주평통 사무처 청사는 1981년 6월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신축하였고 같은 해 7월부터 민주평통 사무처가 인수하여 사용하고 있다. 평화통일비는 민주평통 사무처로 올라가는 길목인 ‘평화통일로’ 개통을 기념하기 위해 2006년에 세워졌다.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장충동에 민주평통이 사무처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독립운동 정신이 궁극적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로 이어져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독립운동이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면, 지금의 과제는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것이다.

민주평통은 국민 참여를 바탕으로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국제사회에서 통일 공공외교를 수행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통일 교육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만큼, 지속적인 노력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필수적이다. 과거 3·1운동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의지가 독립으로 이어졌듯이, 민주평통도 국민과 함께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가기 위해 앞장서고 있다. 결국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은 자유 민주주의와 평화라는 가치 아래 연결되어 있으며, 민주평통은 그 정신을 현재와 미래로 이어가며 평화로운 한반도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장충단 호국의 길

자유와 독립을 향한 ‘장충단비’의 신념이 평화통일을 향한 ‘평화통일비’로 이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