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평화
단절을 연결로 바꾼 작품 ‘시소(Teeter-Totter Wall)’
미국 · 멕시코 국경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남북관계의 돌파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지만, 어두운 밤에 무엇을 해야 할지 냉철하게 물어야 할 시간에 서 있음은 명확하다. 새벽을 열기 위한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때다.
지금 예술에 대한 호출은 그래서 절실하다.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과 새롭게 상상해야 할 것을 환기하고 싶어서다.
이 시점에 필자가 소개할 프로젝트는 2020년 영국 디자인미술관(The design museum)이 선정하는 디자인상을 받은 작품 ‘시소(Teeter-Totter Wall)’다. 이렇게 설명하면 매우 거창한 작품일 것 같지만, 실은 핑크색 시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시소를 사람들이 직접 타고 놀았던 시간은 20여 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광경이 TV와 SNS를 통해 퍼져나가면서 많은 이의 시선을 붙잡았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쯤 타봤을 평범한 놀이기구가 21세기에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멕시코 국경을 가로질러 놓인 핑크색 시소
널리 알려진 것처럼 미국과 멕시코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선 길이는 3,000km가 넘는다. 미국은 2016년 멕시코인의 불법 이주를 막고자 국경 장벽을 강화했다. 2019년 7월 28일, 바로 그곳에 분홍색 시소가 설치됐다. 정확히는 미국 텍사스주 엘패소(El Paso)와 멕시코 시우다드후아레스 사이에 장벽을 가로지르는 시소가 놓였다.
이 프로젝트 기획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건축학과 교수인 로널드 라엘과 산호세주립대 디자인학과 교수 버지니아 산 프라텔로다. 이들이 함께 운영하는 건축 스튜디오 ‘라엘 산 프라텔로(Rael San Fratello)’는 2009년부터 미국·멕시코 경계지역을 연구했다. 양국 관계를 ‘단절’시키는 장소로 보이는 국경을, 시민이 서로 ‘연결’되는 공간으로 만들 방법을 고민했다. 그 결과물이 밝은 분홍색 철제 시소 3개다.
어린 시절 시소를 타본 우리는 그때의 추억을 몸으로 기억해낼 수 있다. 시소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몸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놀이 기구다. 두 사람이 시소 양쪽 끝에 떨어져 앉아 있어도 노는 내내 상대가 자신과 연결돼 있음을 몸으로 자각한다. 바로 그 시소를 경계가 삼엄하기 이를 데 없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가로질러 설치한 것이다.
(Rael Sanfratello 홈페이지)
로널드 라엘은 2017년 발간한 책 ‘건축으로서의 국경 장벽 : 미국·멕시코 국경에 대한 선언’을 통해 이미 미국과 멕시코 사이 국경 장벽이 가져올 여러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자신의 어린 아들과 함께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역, 즉 샌디에이고, 티후아나, 브라운스빌, 마타모로스, 엘패소, 후아레스 등을 탐색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국경지대(Borderlands)’를 촬영하기도 했다. 라엘은 이 작품에서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장벽이 건설된 결과 지역 사람들의 삶과 공간이 어떻게 분리됐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시소’ 아이디어도 등장한다. 일찌감치 개념적으로 구상했던 작품을 2019년 드디어 현장에 설치한 후 라엘은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이 벽은 문자 그대로 미국과 멕시코 관계의 지렛대가 됐습니다. 한쪽에서 일어나는 행동이 다른 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죠. 어린이와 어른이 시소 양쪽에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연결됐습니다.”
미국과 멕시코 장벽 사이에 형광 분홍빛 시소가 설치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웃음을 터뜨리고 행복감을 가득 드러내며 시소를 탔다. 라엘의 바람대로 국경은 ‘폭력과 불법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이 기쁨을 나누는 ‘삶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함께 나누는 기쁨, 흥분, 연대감
라엘은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근처 지역을 탐색하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장벽을 건설한 이들의 의도와 달리 벽을 활용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사람들이 장벽을 사이에 두고 배구 경기를 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발견하고, 국경 순찰요원이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서 슬러시 음료를 구입하면서 벽 사이로 돈을 지불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감지했다. 지금은 비록 삼엄한 분리의 장소일지라도, 벽 사이사이 뚫린 창과 같은 공간을 통해 소통을 이어간 과거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매우 소중한 일이라는 걸 말이다.
소통의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분리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씨앗을 우리 내부에 심어준다. 그래서 라엘은 사람들이 소통의 시간을 망각하지 않도록 다양한 기념품을 만들기도 했다. 그를 통해 장벽은 두 지역을 연결하는 도서관이 되기도 하고, 영화관이 되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악기로 변신하기도 했다.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이 지역의 가장 대중적인 요리인 부리토나 타코 같은 음식을 주문해 먹는 식당이 되기도 했다. 라엘의 이 상상력은 여러 작품으로 제작돼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물했다.
라엘은 당시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에서 “이 행사는 기쁨과 흥분, 연대감으로 가득 찼다”며 특히 적대의 장소가 즐거운 ‘놀이’의 장소로 변화되는 과정을 몸으로 체험하는 것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즐거운 놀이의 장소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유의 소중함을 몸으로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소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소중한 메시지를 주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남북 또한 20분만이라도 DMZ 경계선에서 함께 시소를 탈 수 있을까. 남북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몸으로 자각하게 하는 힘을 느낄 수 있게 될까. 라엘의 사례처럼 우리도 현실이 답답할수록 교류의 경험을 망각하지 않고 더 자유로운 상상으로 우리의 장벽들을 바꿔야 한다. 상상하지 못하면 바꿀 수도 없다.
박 계 리
국립통일교육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