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72023.03.

북한에서 의사 활동을 하다 탈북해 남한에서 한의학 박사,
한의대 교수 된 박지나 원장

슬기로운 남한 생활

북한 의사 출신 한의사 박지나 친한의원 원장

“환자를 부모처럼 여기고 치료해요”

박지나(47) 친(親)한의원 원장은 북한 의사 출신이다. 북한에는 ‘한의사’라는 이름이 따로 없고, 양한방 의료인 모두 ‘의사’라고 부른다. 양한방 협진 체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북한 의사는 양성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양한방 의료 지식을 모두 습득하고, 전공에 따라 특화된 분야를 더 공부한다. 내과의사 출신인 박 원장은 현재 서울 성동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데, 양한방 양쪽에 해박해 단골이 많다고 한다.

그가 ‘친(親)한의원’이라는 이름을 짓는 데는 3년이 걸렸다. 친할 ‘친(親)’은 친하다, 사랑하다, 어버이, 친척 등의 뜻을 갖고 있다. 박 원장은 환자를 부모나 가족처럼 여기고 치료하겠다는 철학을 담아 이런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그의 한의원 내원객 가운데는 중증 질환이나 고질병을 가진 이가 많다.

“한 환자는 꼬리뼈부터 척추라인을 따라 얼음이 계속 차오르는 것같이 느껴진다는 고통을 호소했어요. 원인불명의 잔등냉통(背冷痛)이었죠. 여러 병원을 다니며 갖은 검사를 해도 진단명이 없었다고 해요. 한의학에선 이런 증상을 콩팥 기능과 관련된 것으로 봐 ‘신양허증(腎陽虛症)’으로 진단합니다. 그런데 양방에서는 진단하기 어려워요. 저는 양방과 한방을 넘나들면서 협진 진료를 해야 다양한 원인 불명 질환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악한 북 의료 현장에 실망, 탈북 결심
박 원장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고등중학교 3학년 때는 ‘7·15 최우등상’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 전국 상위 216명에게 주는 상이다. 수상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해당하는 대입시험을 면제받고, 대학별 시험만 통과하면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수상자 대부분이 권력지향적인 꿈을 꾸며 김일성종합대를 지원하지만,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박 원장은 일찌감치 의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제 아버지가 병이 깊었는데 한의학 치료로 회생했어요. 그래서 제게 한의학을 전공하라고 권하셨고, 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지요.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암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산소에 갈 때마다 맹세를 다졌다. 항암제를 개발해 산소에 묻어드리겠다는 다짐이었다. 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스물네 살 때 북한에서 양방 내과의사로 첫 임상을 시작했다. 그가 의사생활을 시작할 때 북한은 3년에 걸친 흉년과 각종 전염병이 겹친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어떤 병이든 다 고치겠다는 열정과 설렘을 갖고 의사생활을 시작했는데, 상황이 너무 열악했어요. 당시 제대로 먹지 못해서 저단백성 부종으로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가 많았어요. 영양이 부족하면 퉁퉁 붓거든요. 원인을 치료하자면 약이 아니라 쌀을 줘야 하는데,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뇨제 투약밖에 없었어요. 가슴이 아팠죠. 당시 전염병 환자 중에는 수액만 제때 맞아도 살 수 있는데 그조차 없어 허망하게 죽는 경우도 많았어요. 제가 아무리 의학 지식이 많고, 임상 실력이 있어도 써먹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의약품 공급, 입원 시스템, 응급 의료체계 같은 의료 인프라가 거의 실종된 현장에서 그는 사회 제도, 국가 정책의 중요성을 깊이 고민하게 됐다고 한다.

“약이 부족해 한 달에 쓸 수 있는 항생제의 양이 딱 정해져 있었어요. 환자에 맞춰 처방을 하는 게 아니라, 약에 맞춰 치료를 하라는 말이니 얼마나 한심해요. 특히 의사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약을 어떻게 아껴야 하나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원장이나 간부들은 멋대로 약을 빼돌려 가져가는 겁니다. 그런 처사에 항의하다가 원장과 갈등을 빚기도 했죠. 의학이라는 신성한 학문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저는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데 기여하겠다는 초심을 지키고 싶었어요.”

박 원장이 탈북한 이유도 바로 거기 있다. 그는 한의학 학문 연구(암 치료제 개발)와 동서 의학의 진정한 협진으로 환자를 질병에서 구원할 꿈을 안고 탈북했다. 학문적 열의로 죽음의 두려움을 넘은 셈이다. 그는 탈북 뒤 중국에서 2년 가까이 머물렀는데, 거처할 장소가 없어서 식당 일을 하며 남한행을 모색했다고 한다.
삼수 끝에 한의사국가고시 합격
박 원장은 2007년 입국 후 독학을 거쳐 2011년 1월 제66회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했다. 합격의 길은 고난의 길이었다. 북한에서 주관식, 논술식 시험만 봐오던 터라 5지선다형 문제풀이 형식이 낯설었다. 기본 의학 과목 외 의료법이나 예방의학 과목 등도 매우 생소했다. 무엇보다 당시 그는 시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꿈은 큰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이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동네 안과를 다니다 종합병원까지 갔지만 오래도록 병이 낫지 않았다. 국가고시 시험장소를 찾아가는 일도 어려워 시험 전날 미리 답사했다고 한다. 다음 날 시간에 맞춰 시험장에 도착하고 보니 이번엔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박지나 원장은 2022년 한약 성분의 항암 효과를 다룬 박사 학위 논문으로 경희대 의학계열 우수학위논문상을 받았다.

“2020년 박지나 원장은 대한한의사협회가 운영하는 한의진료 전화상담센터에서 주말 자원봉사를 해 한의혜민대상 공로표창 대상을 받았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탈북민 정착을 돕기도 했다. 낯선 땅에서 외로움, 고통, 슬픔을 혼자 감당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당당히 섰다.”

“1월이라 날씨가 매우 추웠어요. 다른 학생들은 핫팩이나 무릎담요를 가져와 따뜻하게 시험을 치르더군요. 그런데 저는 불편한 정장을 차려입고, 덜덜 떨면서 문제를 풀었어요. 점심으로 국과 밥을 싸갔는데, 너무 긴장한 데다 추워서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어요. 다른 학생들을 보니 죽을 싸와서 먹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시험 볼 때 죽 먹으면 탈락한다는 말이 있거든요. 또 답안지 작성하는 방법도 잘 몰라 애를 먹었지요. 그러면서도 시험을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시험에 붙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해 박 원장은 보기 좋게 낙방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며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듬해에도 불과 몇 점 차이로 떨어졌다. 삼수 만에 국가고시에 합격한 뒤 그는 빚을 내 한의원을 차렸다.

“큰맘 먹고 시작했지만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언제 신용불량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컸습니다. 더욱이 항암 연구의 꿈은 자꾸만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도 몇 년 지나자 한의원 운영이 어느 정도 안정 되고, 돈도 벌면서 연구자의 길을 다시 생각하게 됐죠. 나이가 더 들면 연구하기 어려울 것 같아 2017년 일단 대학원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북한에서 이수한 석사과정이 인정되지 않아 석사부터 다시 시작해 만 5년을 다녔습니다.”

그는 인삼 추출 성분의 대장암 치료 효과를 다룬 석사논문을 발표했다. 전립선암 관련 한약 성분의 항암 효과를 다룬 박사 학위 논문으로는 의학계열 우수학위논문상도 받았다.

“저는 아직 만족하지 못해요. 제 논문은 세포 수준에서 항암효과를 밝혀낸 것이죠. 앞으로 동물실험을 거쳐야 하고, 그다음 인체 임상시험에서도 효과가 입증돼야 진정으로 인류에 기여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은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절반만 한 것 같아요.”
환자를 생각하는 ‘첫 마음’ 잊지 않을 터
박 원장은 2년 전부터 경희대 한의대 교수로 임용돼 학부 강의를 하고 있다. 서울시 한의사협회 부회장직과 서울시 한의사의 학술 교육을 담당하는 학술위원회 위원장직도 맡고 있다. 2020년 미래한국당 공천관리위원을 지냈고, 현재는 검찰시민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승을 부리던 2020년 박 원장은 대한한의사협회가 운영하는 한의진료 전화상담센터에서 주말 자원봉사를 해 한의혜민대상 공로표창 대상을 받았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탈북민 정착을 돕기도 했다. 낯선 땅에서 외로움, 고통, 슬픔을 혼자 감당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당당히 섰다.

“제가 처음 가졌던 가치관과 마음에서 너무 멀어져선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제 기준은 환자가 치료에 만족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정 현 상 기자 / 사진·지 호 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