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이북의 맛을 전하고픈
나는 ‘먼저 온 통일’입니다
허진 허진닷컴 대표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식대첩> 출연 이후, 그는 남쪽에 북의 손맛을 전하는 대표적인 요리사로 자리매김했다. 눈가림 없이 조미료의 도움 없이, 오로지 북에서 만들고 먹던 그대로. 그는 자신의 손맛이 훗날 조그맣게나마 역할을 하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제 음식이 남북으로 하나 되는
마중물이 되길 바랍니다."
미소금융이 있어 가능했던 정착의 과정
출신을 물었을 뿐인데, 예상외로 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꽤 오래 사셨어요. 제가 8남매인데, 제 위로는 모두 중국에서 태어났고요. 저는 함경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께서 경찰 간부로 근무하신 덕에 여러 군데를 전전해야 했지요. 가장 오래 산 곳은 강원도 이천이었어요. 그러니 고향을 물으면 정확한 답을 하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그저 잘 살다 온 사람으로만 보기는 어려웠다. 어린 나이부터 사업도 해 보았고, 좀 더 나은 돈벌이를 해 보려고 잠깐 중국땅을 밟았는데 그 길로 돌아갈 수 없었을 뿐이다. 운이 나빴다. 그리곤 중국 땅에서 여러 일을 전전하며 살다가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다.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춥디 추운 몽골의 초원을 걸은 끝에 중국 공안과 북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도 천운이었다. 길의 방향을 잘못 잡아 군인에게 붙잡혔는데, 다행히도 몽골군이었고 한국 측에 인계되어 인천으로 들어오게 된 거였다. 그때 그를 붙잡은 게 중국측 국경수비대였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한국에 들어온 뒤에는 일련의 과정을 마치자마자 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강서구 작은 공간에서 고추장을 담가 팔았다. 미소금융에서 지원받은 3,400만 원이 정말 큰 힘이 됐다. 쉬지 않고 몸으로 뛰면서 직접 만든 고추장을 알렸고,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아서 다시 규모를 늘리고 늘리는 식이었다. 대출금으로 산 트럭은 그의 발이 되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입맛과 손맛은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허진 대표가 삶의 터전을 지금의 태백으로 결정한 건 오롯이 남편의 영향이었다. 태백 출신의 남편을 따라온 태백은 너무나 이북을 닮아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남편과 함께 북한식 된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달에 5만 원 버는 때도 있었고, 10만 원 버는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땅이 있고 손수 지은 집이 있으니 버틸 만했다. 그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제대로 된 이북 음식을 선보이겠다는 결심
“<한식대첩>에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는 뭘 이런 걸 다 하라고 하나 싶었어요. 그런데 대중들이 이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북한 음식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죠. 재밌었어요. 배운 것도 많았고요. 그리고 그 뒤로 정말 많은 게 바뀌었어요.”
한번 올라탄 상승세는 가파르지 않아도 꾸준히 위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다. 된장사업도 찾는 이가 많아 궤도에 올랐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느새 20년여. 그 사이 그는 태백을 대표하는 소상공인이 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찾는 사람도 많아졌다. 민주평통에서도 활동하며 일련의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던 차에 인연이 닿아 여러 가지 활동을 할 기회가 만들어지는 중이다.
허 대표는 말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종종 습관처럼 ‘우리는 먼저 온 통일이니까’, ‘나는 먼저 온 통일이라서’라는 표현을 썼다. 신선했다. 우리는 이미 북에서 온 그들과 통일을 이뤄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 그래서인지 그의 말이 유독 뇌리에 남았다.
“된장은 북한도 먹고 남한도 먹잖아요. 맛은 조금 달라요. 남한 된장은 우리한테는 달게 느껴져요. 제가 통일이 될 때까지 이 된장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예요. 내가 처음에 남쪽에 와서 장맛이 입에 안 맞아 힘들었거든요. 남과 북이 빠르게 서로를 품을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된장을 만들어야죠. 나는 그 준비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먼저 온 통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