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간과한 해병 1연대의 숨은 활약상
영광 있는 전쟁은 없다는 묵묵한 가르침
고(故) 고용남 하사 아들 고승익 씨의 생생한 증언
6·25 전쟁의 발발과 정전 협정 체결 이후까지 이어진 7년여, 이글이글한 그 냉전 현장의 산증인을 기억하려고 한다. 해병대 3기의 참전용사로서, 개인적인 불평과 불편을 사치로 여긴 진정한 애국자로서. 바로 고승익(평화통일 포럼연구위원, 서귀포시협의회 자문위원) 씨의 아버지인 고(故) 고용남 하사다. 아버지가 생전에 들려준 이야기를 반추하며 아들은 직접 심은 수국 앞에 함께 섰다. 개안한 꽃은 곧 지면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것이다. 아버지가 겪고 남긴 고통과 희망 섞인 역사의 명멸처럼.

6.25 전쟁 뒤 숨은 병기가 나타났다
1950년 6월 25일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된 날이다.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당한 쓰라린 현실. 맥없이 당하는 무력감은 오래 지체하진 않았다. 국군이 회심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전방에 해병대 3·4기가 나섰다.
“아버지가 19세 되던 해, 해병대 3기로 입대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 7월 초순 제주도에서 모병할 당시 자원하셨어요. 해병대 1·2기는 육지 사람들이었는데, 해병대 3·4기는 제주도 출신의 3천명 대원으로 구성됐어요. 이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서울 수복은 어려웠을 겁니다.”
해병대 3기인 아버지는 제주농고(현 KT플라자 제주점 일대)에서 20여 일간 긴급 훈련을 받았다. 요즘 같은 체계적인 훈련이라기보다 맷집을 키우는 일에 가까웠다. 매일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50대 맞아 똑바로 누워 잘 수조차 없었다.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을 마친 후 해병대 창설 이래 최초의 상륙 작전으로 알려진 통영상륙작전이 일어나던 시점, 아버지는 거제도로 파병되었다. 이후 부산 주둔을 명 받아 내려왔는데, 아버지는 ‘웃픈’ 환영 인사를 기억했다.
“어디 거지 자식들이 이제 오네.”
제대로 된 군복조차 갖춰 입지 못한 해병대 3·4기에 대한 후배 5기생의 솔직한 소감이었다.



해병대의 의(義)가 세상에 드러난 도솔산 전투
곁에서 듣던 아버지의 이야기는 역사책의 페이지를 뜯어보는 듯했다. 그는 곧 부산에서 미 군함을 타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수복 작전에 나섰다. 연희고지 전투를 거쳐 명실공히 ‘대한민국 해병대의 제1연대(이후 해병 1연대)’ 소속으로서 중앙청에 태극기를 가장 먼저 게양하는데 일조했다.
“이후 함경도 흥남까지 북진했어요. 고작 주먹밥 배식이라 미군이 쓰레기통에 버린 전투식량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대요. 잔디밭 위에 텐트를 치고 잠들곤 했는데, 죽은 아이들이 묻힌 자리라 대다수 동료가 악몽을 꿨다는 경험담도 들려주었죠. 그래도 흥남에 주둔할 당시엔 가장 풍족한 생활을 했대요. 당시 봉급이 2천 원 정도였는데, 남한에서와는 달리 100원만 내도 사과 한 상자를 살 정도였으니까요. 그 후 중공군에 의해 후퇴하게 되었죠.”
1·4 후퇴 후 1951년 6월, 도솔산 전투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솔산 일대는 훈련을 잘 받은 인민군 2개 사단, 해병 1연대의 5배 가까운 병력이 점령하던 지대로 미군조차 포기한 곳이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매일 이야기하다시피 한, 가장 치열했던 기억의 전투였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진격했던 거죠. 아버지로선 큰 공로를 세운 전투였는데, 가장 힘겹기도 했을 거예요. 전우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거든요. 시신을 운구할 트럭이 한 대 오면 두 대가량 되는 시신이 쌓일 정도였죠. 영화 같은 에피소드도 들었어요. 아버지가 손가락을 펴고 있는데, 그 사이로 총탄이 휙 날아갔다는.”
도솔산 전투의 놀라운 공적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부대에 방문한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빨간 군화를 지급하고, 미군과 똑같은 대우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해병대의 전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동시에 대원 하나하나 뿌리 깊은 자부심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2년간의 이등병, 늦었지만 회복된 명예

“아버지의 인생엔 참 기막힌 게 많아요. 참전한 50년부터 2년간 이등병이었지 뭡니까. 보통 계급이 올라가기 마련인데, 52년 말이 되어서야 일병이자 상병이 되었죠. 53년 휴전된 후에나 첫 휴가를 얻었고요.”
7년 만에 하사로 전역한 후 이른 53세의 나이로 별세한 아버지. 고승익 씨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아버지가 국가유공자로 임명된 것도, 훈장 수여 사실도 알았다. 1952년 말, 아버지는 일병임에도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충무무공훈장은 5등급의 훈장 중 3등급에 해당, 일병으로서는 파격적이었으나 수행한 공적에는 합당한 것이었다. 더욱 이례적인 것은 당일 상병으로 진급해 화랑무공훈장도 받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하루 사이에 훈장 2개를 받은 셈이에요. 1년 후 화랑무공훈장을 하나 더 받고 전역하신 거죠. 표창장도 여럿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안타깝습니다.”
아버지의 행적을 찾아 행정안전부 상훈과에서 해군 본부로, 또다시 해군사령부로 전화를 돌리고 일일이 확인하는데 걸린 시간이 4개월이었다. 3개의 훈장수여증명서는 직접 발로 뛰며 확인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표상이었다. 긴 명예 회복은 마을 공동묘지에 묻힌 아버지가 제주시 호국원에 평온히 잠든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영광 있는 전쟁은 없기에
자신의 공적을 오히려 숨기는 편에 가까웠던 이유는 고(故) 고용남 하사의 성품 때문이다. 참전용사로서 변변한 보상 없이 전쟁 후유증을 겪는 와중에도 그 흔한 불평 한마디 하지 않은 당신이었다. 이겨야만 살 수 있고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한 전쟁 앞에서 자신의 영광은 중요하지 않았다. 평화로울 권리가 있는 모든 삶에 대한 존중이었다.
“아버지는 똑똑하면서 상당히 인자한 분이셨어요. 제가 상병으로 복무 중일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제 인생에서 가장 고된 때였죠. 남에게 빌려준 돈이나 밀감 농사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가족 사이 분쟁도 일면서 모든 재산이 일시에 사라져 버렸죠.”
고승익 씨는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긴 사람도, 동시에 존경하는 사람도 아버지라 토로했다. 전쟁 시에는 국가와 민족을 지켰고 전역 후엔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한 그 마음과 행동을 또렷이 기억하는 까닭이다. 스스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따고 막내 동생 승우를 사람 살리는 의사로 키우기까지, 아버지가 제 본분을 지켰던 겸손한 사명감이 동력으로 작용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느냐는 한강 작가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문득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가 무엇을 가장 함께 하고 싶었을지 궁금했다. 일말의 주저함 없이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는 일이라 했다. 평화란 그렇다. 잃어버린 후엔 크고 작은 상흔을 남기지만, 그 전엔 이리도 소박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