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5+06 Vol.215

보은의 햇살 아래 포도 농사로 일구는 새로운 희망

조순실 순실포도농장 대표, 자문위원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13년간 운영한 한복점을 정리하던 조순실 대표는 귀농을 결심했다. 그러던 중 충북 보은군을 알게 되었고, 그곳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장의 이름처럼, 지금껏 받은 은혜를 갚으며 살겠다는 생각으로 보은에 온 지 어느덧 4년이 흘렀다. 조 대표의 삶은 그녀가 수확하는 포도처럼 풍성하게 영글고 있다.

"귀농 후 삶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어요."

성공과 부침을 모두 경험하다

1967년 함경북도 김책시에서 태어난 조순실 대표는 조선노동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친척들 덕분에 비교적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사회 시스템이 급격히 붕괴되면서 갑작스럽게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97년 외아들을 시댁에 맡긴 뒤 목숨을 걸고 평양에 들어간 그녀는 친척들에게 받은 쌈짓돈을 밑천 삼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원단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점점 커졌고, 조 대표는 1998년 5월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다. 8년 간의 고된 중국 생활을 거쳐 2005년 12월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2006년 4월 하나원을 수료한 조순실 대표는 불가마 사우나 마사지와 미용 등을 배우며 새 삶을 준비했다. 2007년 남편을 만나고 생활이 안정되자, 북한에서 원단 일을 즐겁게 했던 기억이 떠오른 조 대표는 한복 짓기에 도전했다. 2008년 한 해는 맞춤 한복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지만, 막상 완성된 한복을 어떻게 판매할지 막막했다. 팔 길이 막막하던 그녀는 이듬해 한복 체인점에 미싱사로 취업했다. 두 달 동안 한복을 만들며 고객 응대, 거래처 관리, 매장 운영 등을 직접 익혔다. 그렇게 실무 경험을 쌓은 뒤 2009년 8월, 서울시 은평구에 한복점을 열었다.

한복 디자인과 품질이 뛰어나면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사업은 점점 번창했다. ‘한복 잘 짓는 이북 언니 가게’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그러던 중 북한에 있던 오빠 가족이 2012년에 탈북해 한국에 왔다.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1층에 족발·보쌈집을 열고, 한복점은 2층으로 옮겼는데, 서로의 생각 차이로 함께 살지는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에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생기고, 장사도 침체기에 접어들었어요. 하는 수 없이 은평구 생활을 접고 영등포와 부천으로 옮겨 한복점을 다시 열었는데, 부천에서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 사태가 터졌어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결국 한복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죠.”

포도와 함께 익어 가는 제2의 인생

조순실 대표는 가게를 정리하면서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어 귀농을 결심했고, 중국에서 포도 농사를 지었던 경험을 살려 작물로 포도를 선택했다. 귀농할 지역을 찾던 중 충북 보은군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감도 좋고, ‘은혜를 갚는다’는 뜻이 마음에 들어 곧바로 답사에 나섰다. 그리고 마로면에 1,200평 규모의 밭을 임대했다. 2020년 11월 한복점을 폐업한 뒤, 12월에는 포도 농사를 위한 시설을 설치했고, 2021년 초에는 주거지를 옮겨 보은군민이 됐다.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투자를 이어갔어요. 샤인머스켓 나무 480주를 심고, 관정을 뚫고, 작업장을 만들었죠. 2023년에는 인근에 1,150평 규모의 새로운 밭을 임대해 거봉과 샤인머스켓을 반반씩 심었어요. 처음 임대했던 밭은 매매해서 이제는 온전히 우리 소유가 됐고, 올 가을에는 포도 판매를 위한 저온창고를 짓기 위해 준비하고 있어요.”

4년간 밭에서 생활하며 정성을 쏟은 결과, 작년에는 첫 번째 밭에서만 고품질의 샤인머스켓 2만 송이를 수확해 판매했다. 올해부터는 두 번째 밭에서도 알찬 포도송이가 열릴 예정이어서, 조순실 대표 부부의 살림살이는 점점 더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조 대표는 앞으로 더 많은 밭을 임대해 지속적으로 수익을 늘려갈 계획이다.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민주평통 보은군협의회에서는 작년 보은대추축제 때 포도 판매를 도와주셨고, 포도 농사에 필요한 각종 물품도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셨어요.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일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작년 11월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요. 올 2월 민주평통 보은군협의회 정기회의에서도 더 나은 통일 방안을 논의하며, 제 경험을 바탕으로 의견을 나눴는데요. 앞으로도 제 이야기가 통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문위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활동할 거예요.” 포도 한 송이 한 송이에 정성을 담듯이 통일을 향한 조순실 대표의 걸음도 힘차게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