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5+06 Vol.215

남북한 대중음악의 엇갈린 궤적:
음악으로 본 남북의 80년

닮아가는 형식, 달라지는 메시지···
분단된 체제의 본질적 차이 반영

한때 같은 노래를 부르던 남과 북은 이제 서로 다른 노래로 다른 현실을 말하고 있다. 1948년 애국가를 따로 제정하며 시작된 음악의 분단은 80년의 세월 동안 감정의 형식과 표현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다. 남한의 음악이 일상과 유희 속에서 감성을 자유롭게 확장해 온 반면, 북한의 음악은 체제의 틀 안에서 감정을 설계하고 배치해 왔다. 오늘날 남북한의 음악은 여전히 단절된 가사 속에서 서로 닿지 않는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다.

2018년 4월 3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합동공연 ‘우리는 하나’에서 남북 가수들이 ‘다시 만납시다’를 부르고 있다. ©VOA

두 개의 애국가, 갈라진 한민족의 정체성

1926년,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던 가곡 「봉선화」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슬픔과 저항의 노래이자, 분단 이전 한민족이 함께 부르던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48년, 남한은 안익태가 작곡한 현재의 애국가를 채택했고, 북한은 김원균 작곡의 애국가를 공식화했다.1) 각기 다르게 제정한 애국가에 국가(國歌)의 지위를 부여하면서 음악의 분단이 시작된 것이다. 한반도에 두 개의 애국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단순한 음악의 차이를 넘어서 각기 다른 정치 체제와 문화적 정체성의 분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1) 2024년 북한은 애국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로 명명하며 체제 정당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서구의 파장과 이념의 재편

한국전쟁 이후 남한 지역에 미군이 계속 주둔하게 되면서 미국 대중음악이 남한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남한 대중음악은 미8군 무대를 통해 미국 음악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는 계기를 맞는다. 당시 김시스터즈의 등장은 재즈와 영어 가사라는 낯선 양식을 한국 대중문화 속에 들여오며 새로운 음악 장르를 알렸다. 이들은 서구 음악과 한국적 감성을 결합한 감각적 근대화의 출발점이자, 이후 대중음악 산업화의 토대를 형성했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전통 민요를 통해 민족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대표적 인물인 왕수복은 1955년 국립교향악단 성악가로 활동하며 ‘신아리랑’, ‘능수버들’ 등을 부르며 주목받았다.2) 당시 북한 음악은 본격적인 이념화가 시작되기 전이었으나, 민요를 바탕으로 민족적 감성과 사회주의 이념을 결합하려는 흐름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남한은 서구 대중문화를 빠르게 흡수하며 음악의 외형과 산업구조를 바꾸어갔고, 북한은 음악을 민족적 통합과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한반도 음악은 이 시점부터 양적, 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2) ‘왕수복’, 「20세기 북한예술문화사전」, http://nks.ac.kr/Word/View.aspx?id=2027(검색일: 2025.4.10.)
김시스터즈 1집 앨범 사진 ©e-뮤지엄 왕수복 사진 엽서 ©e-뮤지엄

1980년대: 감각의 해방과 장르의 실험

1980년대 남한의 대중음악은 디스코, 펑크, 소울 등 다양한 장르가 유입되면서 나미의 ‘빙글빙글’(1984), 김완선의 ‘오늘밤’(1986) 등 신체의 움직임과 감각을 자극하는 댄스음악으로 대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동시에 팝 발라드, 록, 민중가요도 함께 발전하며 음악은 개인의 감성과 저항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감정 표현의 매체로 자리 잡았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음악이 민족 정체성과 체제 의식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 한편, 왕재산경음악단(1983)과 보천보전자악단(1985) 등 전자악단 창립을 통해 새로운 음악적 양식을 실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럼에도 음악은 내용적 측면에서 여전히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과 사회주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이 시기의 남북한 음악은 모두 새로운 양식에 대한 실험을 시도했지만, 남한은 감정과 감각의 확장을 수용하였던 반면, 북한은 통제 속 체제 유지의 틀 안에서 제한적으로 새로운 양식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1990년대: 문화산업의 확장과 이념음악의 회귀

1990년대에 들어서며 남한 대중음악은 급격한 산업화의 길로 접어든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은 힙합, 랩 등의 장르 융합을 최초로 시도하며 현재까지도 한국 대중음악의 전환기를 가져온 문화적 상징으로 평가된다. 이후 대형 기획사를 중심으로 아이돌 체제가 자리 잡았고, 이 시기 남한의 음악은 다양한 장르를 한국적 정서에 맞게 풀어내며 청중의 감정과 욕망에 맞게 기획되고 소비되는 문화산업의 형태로 진입했다.

한편, 북한은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과 함께 1991년 보천보전자악단의 일본 공연을 계기로 전자악단의 존재를 대내외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데뷔 시기가 늦어진 것은 서구적 음악 문법에 대한 내부적 충격을 고려한 통제된 실험이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당시 악단을 대표했던 김광숙, 전혜영, 리분희, 조금화, 리경숙은 독창 앨범을 발표하며 개별 가수들의 개성을 드러냈다. 음악의 형식은 현대화를 지향하면서도 ‘우리식’이라는 사회주의적 정체성 기반의 틀을 유지했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의 사망과 자연재해로 시작된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공훈국가합창단 중심의 남성 대규모합창단 체제로 회귀하면서, 음악은 강인함과 체제 충성심을 고양하는 방식으로 재편되었다. 이처럼 1990년대는 남한이 대중 감성을 중심으로 한 표현의 자유와 소비문화의 확산을 이룬 시기였다면, 북한은 외형적 현대화와 내부 통제를 병행하는 실험적 국면에서 다시 체제 중심으로 돌아간 시기였다.

『서태지보이스』 음반(서태지와 아이들, 반도음반) ©e-뮤지엄

2010년대: 기호의 확산과 통제의 미화

2009년 남한에서는 걸그룹 소녀시대가 ‘Gee’와 ‘소원을 말해봐’로 인기 순위를 석권했다. 이들의 성공은 단지 음악적 인기 이상으로, 군무 중심의 퍼포먼스와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가 대중문화 속에서 반복되고 소비되는 하나의 기호로 작용했다. 한편 2009년 북한에서는 은하수관현악단과 삼지연악단이 등장하며 새로운 음악적 흐름을 예고했다. 이들 악단은 세미클래식 기반의 기악 중심 편곡으로 경음악 위주의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기존 합창과 가요 중심의 형식에서 벗어나 해외 유학파 연주자들을 대거 기용하며 음악적 세련미와 예술성에 주력했다. 그럼에도 지도자 우상화와 체제 선전을 담은 가사 내용은 변함이 없었다.

2012년 남한에서는 싸이(PSY)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으며 K-pop 세계화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싸이는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역동적인 말춤으로 한국적 감각을 글로벌 콘텐츠로 변환해 냈고, 이는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대중 스스로 즐기고 소비하는 음악의 힘을 보여주었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김정일 사망 이후 2012년 김정은이 정권을 승계하며 세대교체에 따른 쇄신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연출했다. 이는 모란봉악단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화려한 미니드레스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장면, 미국 팝 음악 선율 등으로 기존 북한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요소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격은 철저히 통제된 기획으로, 여전히 지도자의 실명이 가사에 등장했고 체제 선전 담론을 반복했다. 결국 모란봉악단은 세련된 외형과 감성으로 통제를 미화한 결과였다. 이 시기 남북한 음악은 모두 외형적으로 큰 전환을 시도했다. 남한에서는 음악의 소비자와 창작자가 소통을 통해 문화를 만들어 가며 음악을 다층적 상징의 공간으로 확장해 나갔다. 반면 북한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형식적인 세련미를 도입했지만, 그 메시지는 여전히 지도자와 체제 중심의 선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공훈국가합창단 CD 커버 ⓒDiscogs 2015년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제5차 훈련일꾼대회 참가자를 위한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SBS 뉴스

2025년: 일상적 유희와 국가적 서사

2025년 1월, 그룹 블랙핑크(BLACKPINK)의 로제(ROSÉ)와 브루노 마스(Bruno Mars)가 협업한 곡 ‘APT.’가 미국의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에서 연속으로 순위권에 오르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APT.는 단순한 술 게임에서 유래한 리듬과 멜로디가 반복되며 순간의 사랑과 감정, 욕망의 고백, 도피적 열정을 담은 가사로 구성된 노래다. 이 노래는 국내에서는 익숙한 일상감을, 해외에서는 문화적 생소함과 유쾌한 신선함을 동시에 자극했다. 세계적 아티스트와의 협업은 한국의 고유성과 대중성이 K-pop이라는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더욱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줬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국무위원회연주단 소속 가수인 김옥주가 부른 신곡 ‘우리는 조선사람’이 주목을 받았다. 이 곡은 기존의 지도자 찬양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조국을 운명 공동체적 존재로 전환시키며 기존 북한 음악과는 다른 감성 전략을 보여줬다. 내용 면에서 선전·선동의 목적은 유지되지만, 힘든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개인의 감정에 내면화시켰다. 또한 기존의 집단적 합창 구조에서 벗어나 개별 청자의 감성 몰입을 고려한 ‘감상 중심’의 구조로 전환되었다. 이는 체제 선전과 감성 전략이 혼합되며, 기존의 전형적인 이념 지향적 대중가요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2025년 남북의 음악은 감정과 감성을 다루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과 사회적 수용 측면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남한의 음악은 초국적 감각을 공유하는 플랫폼 속에서 자율적으로 소비되고 해석되는 반면, 북한의 음악은 감정을 동원하되 여전히 체제가 허용한 범위 내에서 재구성된다. 애국가에서 분화된 남북한의 음악은 기술 발전에 힘입어 공통의 감각이 공유됨에 따라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점차 접점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음악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고 말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여전히 분단된 체제의 본질적 차이를 반영한다. 이러한 차이는 오늘날 한반도 대중음악의 이질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남북한의 음악은 오랜 시간 같은 슬픔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점차 이질적인 감정의 언어로 진화해 왔다. 남한은 감성을 소비하고 자유롭게 확장하는 음악을 통해 개인의 감정과 집단의 욕망을 표현해 왔지만, 북한은 체제의 목소리를 감정의 언어로 번역하며 감성을 동원해 왔다. 오늘날 남북한 음악은 형식적으로는 비슷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무엇을 노래하고, 무엇을 노래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은 여전히 서로 다르다. 음악은 여전히 남과 북이 공유하지 못하는 가장 정서적인 언어이자, 체제가 감정을 구성하고 표현하게 만드는 구성된 언어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노래를 부르고 있다.

로제의 새 싱글 ‘아파트’ 뮤직 비디오의 한 장면. ©더블랙레이블 북한 국무위원회연주단 소속 가수 김옥주 ⓒ뉴시스의 조선중앙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