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미국 국가안보전략서와 글로벌 권역질서의 서막
자유주의 질서의 후퇴와 아시아 권역질서의 재편
지난 12월 4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국가안보전략서(National Security Strategy)를 발표했다. 비록 쇠퇴하고 있지만 분명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구상하는 세계정치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2016년 11월 워싱턴의 이단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그의 개인적 특성과 독단적 행보에 대한 논평과 기사가 줄곧 쏟아졌다. 실제로 그의 발언과 정책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코로나19의 발발 가운데 재선에 실패했지만 다시 백악관에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앞선 1기를 발판 삼아 다양한 정책을 줄기차게 실행에 옮기고 있다. 미국발 관세인상과 이민 통제는 그야말로 세계질서의 근간을 흔든다. 그렇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는 무엇일까? 그러한 거센 파도 속에 우리가 지향하고 실행할 바는 무엇인가?
백악관의 외관, 미국은 더 이상 세계를 하나의 질서로 묶으려 하지 않는다. 이번 국가안보전략은 ‘세계패권’이 아닌 ‘서반구 패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권역 질서의 출발을 선언한다. ⓒ셔터스톡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후퇴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은 “어떻게 미국의 전략은 길을 잃었는가?”로 시작한다. 탈냉전기 미국 엘리트들이 오판했다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 미국 국익이 아니라 세계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바람직하지 않고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했다는 비판이다. 이는 미국 내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이 글로벌 금융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신랄하게 꼬집은 바이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은 “거대한 망상”에 사로잡힌 채 자유패권전략(strategy of liberal hegemony)을 구사했고 실패했다. 세계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겠다는 전략은 오만했고 무모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자유무역·인권존중이라는 세 원칙에 기초한 자유패권전략은 소련의 공백 속에서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확장을 추구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전략이 미국을 소모적 전쟁과 무익한 무역으로 국력 손실의 늪에 밀어 넣었다고 꼬집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트럼프 행정부는 서반구(The Western Hemisphere)에서의 압도적 지위를 강조한다. 2025년 국가안보전략은 세계를 다섯 지역(서반구, 아시아, 유럽, 중동, 아프리카)으로 나눈 후 미국이 서반구에서 누릴 압도적 지위와 영향을 강조한다. 이러한 전략은 ‘먼로 독트린’을 연상시킨다고 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을 활용한 ‘돈로 독트린’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다. 아무튼 중남미에서 외부인은 출입 불가이다. 19세기 유럽 열강을 막고자 했고, 이제는 중국을 거부한다. 2010년대 중남미 지역, 핑크 타이드 물결 속에 멕시코, 페루, 볼리비아, 칠레, 브라질, 과테말라 등에서 좌파 정부가 집권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러한 서반구(북미·중미·남미)에서 부상하는 반미 흐름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지역 패권을 공고히 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감행한 미국은 마두라 정권의 퇴진을 종용하고 있다. 마약 밀매와 인신매매를 일삼는 테러 조직으로 규정하고 베네수엘라 내정의 변화를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복귀를 확정한 이후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 캐나다 등을 구입 혹은 병합할 수 있다는 발언들을 생각나게 한다. 영토주권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들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계인들을 깜짝 당혹케 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미국이 서반구 패권국이라는 인식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들 위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서반구 패권전략은 역내 미국이 보유한 상대적 역량을 생각할 때 실현 가능하다. 물론 이번 국가안보전략이 강조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스스로 갉아먹겠지만 압도적 힘을 통한 역내 관리와 질서유지는 실현 가능한 목표로 생각될 것이다.
먼로주의(독트린)을 주장한 미국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의 초상화. 19세기 유럽 열강을 견제하기 위해 제시됐던 먼로주의는 21세기 들어 중국의 서반구 진출을 차단하기 위한 미국의 지역패권 전략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National Gallery of Art
마두라 정권에 대한 군사·외교적 압박은 19세기 먼로 독트린을 연상시킨다. 트럼프 행정부는 서반구에서만큼은 미국이 단독 패권국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셔터스톡
미국과 맞먹는 지역패권국은 불가
그럼 서반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국가안보전략은 세력균형을 이야기한다. 아시아, 유럽, 중동, 아프리카에서 역내 패권국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희망하는 글로벌 권역 질서에 따르면, 서반구만 지역패권국이 존재하고 다른 지역에는 세력균형이 유지된다.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는 세계패권국을 지향했지만 이제는 유일한 지역패권국을 추구한다. 이는 자유패권전략을 통렬히 비판했던 현실주의자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의 공격적 현실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바다를 건너서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패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는 것이 그의 기본 전제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동급인 지역패권국의 부상만 막겠다는 전략을 명시화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아시아는 관심 지역이다. 미국이 팔짱만 끼고 있으면 중국이 지역패권국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이번 국가안보전략서는 아시아에서 군사적 위협에 대한 억지와 관련한 상세한 논의가 포함되었다. 핵심 경제 파트너인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군사력을 동원한 현상 변경을 좌시하지 않을 의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서 한국, 일본, 호주 등의 동맹과 우방이 감당할 역할 역시 명시되었다. 서반구 국가로서 홀로 아시아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미국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도 미국 없이 중국의 부상을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동맹의 미래가 탈 단극 시대에도 굳건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렇지만 유럽은 상황이 다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어떻게 러시아를 다루고 견제할지가 중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그 역할을 미국이 주도적으로 맡을 생각이 없다. 오랫동안 무임 승차한 나토 동맹국의 차례임을 미국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유럽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돕겠다”(Enabling Europe to stand on its own feet)는 국가안보전략서의 표현은 미국의 속내를 완곡하게 담고 있다. 한편, 중동과 아프리카는 경제적 중요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잠재적 패권국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세일 혁명과 에너지 전환으로 중동의 중요성이 약화된 상황에서 미국은 이들 지역과의 전략적 협력을 선택적으로 진행하며 불필요한 국력 소모를 피하고자 애쓸 것이다. 세계 경찰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다음 차례는 동아시아라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럽과 아시아, 러시아와 중국을 바라보는 미국의 평가와 바이든 행정부는 유럽과 아시아의 동맹들을 NATO-AP4(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라는 형태로 연계시키고자 했다. 민주주의에 대항한 권위주의 부상이라는 관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자유네트워크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아시아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핵무기를 제외하고 러시아에 모든 면에서 우세인 서유럽을 우리가 도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2010년대에 들어서 세계 2위 경제 대국에 올라선 중국이 현재 선보이는 인공지능과 에너지 분야의 기술혁신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중국이 부담스러울수록 미국은 아시아 동맹에게 눈을 돌리는 형국이다.
자유패권전략을 비판해 온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의 공격적 현실주의는 미국이 세계패권보다 지역패권을 우선해야 한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전략 인식과 맞닿아 있다. ⓒ위키미디어
나토 본부 전경.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 안보 문제를 미국이 대신 해결하기보다 유럽이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다. ⓒ셔터스톡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후퇴 속에서
아시아는 어떠한 권역 질서를 맞이할 것인가?
한국, 미국, 그리고 아시아 민주국가들은
유사한 전략적 이해와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조율하고
실현하는 방식은 예전과 달라졌다.
그것을 위해 무엇을 각자 양보해야 하는지를
줄기차게 논의하고 협상할 것이다.
외교의 시대, ‘가치와 신뢰’보다 ‘이익과 거래’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후퇴 속에서 아시아는 어떠한 권역 질서를 맞이할 것인가? 한국, 미국, 그리고 아시아 민주국가들은 유사한 전략적 이해와 목표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을 조율하고 실현하는 방식은 예전과 달라졌다. 민주주의와 인권 존중이라는 가치를 두고 의기투합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 결집을 통한 이익확보를 위해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변환한다. 독재자와 조건 없이 대화하고 협상하는 미국 대통령이 낯설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대통령이 우리와 협력하고자 악수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서로의 이익을 증진할 방안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각자 양보해야 하는지를 줄기차게 논의하고 협상할 것이다. 여전히 가치와 신뢰가 국제정치에서 영향을 발휘할 수 있겠으나,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하는 국제관계 속에서 그 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수호할 것과 양보할 것을 구분할 지혜와 우리의 목표를 뚝심 있게 관철시킬 용기가 필요한 전환의 시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