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12 Vol.218

따뜻한 손길 받아 정착한 나
이젠 나도 도우며 살렵니다

전화로 느꼈던 분위기와는 달리 그는 수줍은 소녀 같았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뭐 하나라도 더 들려주려고 하고, 뭐 한 가지라도 더 먹을 것을 내어주려고 했다. 작은 식당의 사장님인 그녀는 그렇게 자기가 가진 걸 내어주며 마음을 열고자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김은주

속초 낭만갈비 대표

언젠가는 북의 우리 백두산을
여행하는 날이 오겠죠?

남한 노래에 반한 경성군의 소녀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함경북도 경성군은 북에서 유명한 지역이다. 온천이 좋기로 이름이 높다. 속초에서 갈빗집을 운영하는 김은주 대표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

“북한의 3대 장군이라 칭송받는 장군들의 업적이 있는 곳이에요. 온천이 얼마나 좋은지 피부병이 있거나 불임인 사람은 그곳의 온천을 가면 낫는다고도 했어요. 바다도 좋고, 산과 물이 다 좋은 곳이에요. 특히 물 좋기로는 북에서 첫손에 꼽을 만하죠.”

고향을 물었더니 신이 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런 곳이다. “거기가 그렇게 유명한 곳이었군요?”라고 물었더니 “기차 중에서도 급행은 그냥 지나쳐 가는 곳이 많잖아요? 경성군은 무조건 멈춰요. 그 정도로 알려진 곳이죠” 통일이 되면 언젠가 우리도 그곳을 가 볼 수 있겠지 생각했다.

김은주 대표의 부모님은 둘 다 노동자 신분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할아버지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아 불이익을 많이 당해야 했다. 젊어서 결혼하고 김 대표를 낳은 후로는 북한 사회에 불만을 더 가질 수밖에 없었다.

“북에서 교육받기로 남한 사람들은 굶으며 살고 기운 옷을 입고 산다고 했거든요. 아버지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아셨어요. 1997년쯤에 텔레비전에서 속보로 대학생들의 인권운동, 학생운동 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때 그러시더라고. 저기 어디에 기운 옷을 입은 사람이 있냐고. 저게 배고파서 싸우는 거냐고”

호기심이 많은 10대 시절에 남한의 음악을 몰래 접하게 되면서 북한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더불어 남한에 대한 환상을 가지게 됐다. 천국같이 보였다. 너무나도 가고 싶었다. 언젠가는 나도 탈북해야지, 그때 처음 결심했다. 우연히 국경에 사는 친척을 통해 중국으로 가게 됐는데, 이 역시 북한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나중에는 북에 남아 있던 엄마도 중국으로 넘어왔다. 몇 년 뒤 교회 목사님의 도움을 받아 엄마를 먼저 한국으로 보내게 됐다. 뒤이어 김 대표도 한국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잡게 됐다.

끼니 대신 집 사는 게 고민인 행복

바라던 땅. 드디어 그곳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생각했다. ‘나는 천국에 왔다’라고. 적응 교육을 받고 처음 정착한 곳은 경기도 안산이었다. 엄마와 같이 살던 중에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았는데, 군인 신분이었던 터라 가평으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됐다. 그리고 근무지가 바뀌면서 속초로 옮겨와 갈빗집도 열게 됐다. 뭣도 모르던 시절 상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괜찮았다. 내 힘으로 뭐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동안 힘든 일이 많았죠.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좋은 일이 훨씬 많았어요. 북에 있을 때는 끼니 해결하는 게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는데, 여기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고민하잖아요. 집을 어떻게 사야 하나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건 차원이 다른 거예요. 북한에 있었으면 저는 바나나 맛도 모르고 죽었을걸요.”

물론 생계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난제다.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문을 연 게 지금의 갈빗집이다. 이제 5개월 차. 생각처럼 장사가 잘되는 편은 아니다. 노래를 좀 하니까 아침 방송에 나가 내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를 불러서 홍보를 좀 해 볼까 했는데, 그마저 쉽지 않았다. 탈북민은 출연이 제한된다는 게 이유였다. 많이 서운했다. 그럼에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을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한국에 와서 받은 게 너무 많다. 처음에는 그게 얼마나 고마운 건지 몰랐다. 북에서 자란 사람은 타인의 호의가 익숙하지 않다. 감사함보다는 의심을 먼저 하는 게 체화돼 있다. 한국에 와서야 깨달았다. 그것이 대가 없는 마음이라는 걸. 특히 민주평통 가평군협의회와 속초시협의회의 지원은 잊을 수 없다. 어려운 시기마다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은 두 협의회의 도움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건네준 소중한 힘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나도 열심히 살아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꿈. 그게 얼마나 커다란 힘인지 이제는 안다. 김은주 대표는 오늘도 그 꿈을 품고 가게의 문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