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1+12 Vol.218

APEC 정상회의,
경주에서 새 질서를 말하다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향한 도약, 정상회의의 의미와 향후 과제를 논하다

천년고도 경주에서 2025년 APEC 정상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번 회의는 APEC 정상회의 이상으로 한반도와 글로벌 안보 및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미국과 중국의 강대국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한미, 한일, 그리고 한중 정상회담이 연달아 개최되었다. 또한 한국의 글로벌 기업 회장을 비롯하여 세계 유수의 CEO가 참여하는 글로벌 CEO 정상회담도 개최되었다. 따라서 이번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는 정상회의 주간을 포함하여 일주일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반도 평화 안보, 강대국 협력 정치, 세계 경제 및 미래 지구촌의 핵심 의제를 논의하는 등 정상회의의 파노라마를 연출하였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CEO(최고경영자) 서밋’ 개회식에서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실

APEC 정상회의에서 거둔 외교적 성과

쉼 없이 전개된 이번 정상회의 파노라마의 주역은 단연 개최국 한국이었고 외교적 성과도 기대 이상이었다. 첫 번째 성과는 결과가 불확실하여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왔다. 지난 8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매우 힘든 입장이었다. 즉,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미국에 투자해야 대미 관세를 15%로 해줄 수 있다는 미국의 일방적이고 비타협적 입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 대미 협상팀은 경주에서 극적인 관세 협상을 매듭지어 경제적 불투명성과 불안정성을 제거하였다. 더군다나,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는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과 과감한 협상 제의로 미국으로부터 핵 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을 얻어냈고 우라늄 농축 및 사용 후 연료봉 재처리 권한 확보를 위한 가시적인 추가 발판도 마련하였다.

글로벌 안보와 세계 경제에서 미국과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의 주요 성과로는 시대적 변화에 발맞춘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발전에 뜻을 같이하기로 합의한 점, 정부 간 정치적 신뢰를 확보하고 민간 차원에서도 우호적인 신뢰의 축적을 병행하기로 한 점, 고위급 정례 소통 채널을 가동해 한중 관계 현안 및 지역과 글로벌 이슈에 대한 전략적 소통을 강화하기로 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중 경제 협력의 구조 변화를 반영하여 수평적 협력에 기초한 호혜적 협력을 추진해 양국이 민생 분야에서 실질적 협력 성과를 창출해내기로 합의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국익 중심 실용 외교의 피부에 와닿은 구체적 성과라 할 수 있다.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의 또 다른 중요한 성과는 개최국 한국의 부단한 노력과 회원국 정상들의 만장일치로 문화 창조 산업 분야 협력 필요성을 담은 경주선언이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연결·혁신·번영을 기본 틀로 삼은 경주선언은 국제경제가 불확실한 가운데 21개 회원국이 무역을 비롯한 주요 국제적 경제 현안에 대해 포괄적 협력의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이번 경주선언을 계기로 APEC 회원들은 연대와 협력 정신을 복원하고 아태 지역 경제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갈 토대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미국과 중국이 모두 참여하고 APEC 창설 이래 최초로 명문화된 인공지능(AI) 공동 비전인 ‘APEC AI 이니셔티브’와 저출생 고령화 등 인구구조 변화가 역내 공통의 도전과제라는 인식에 기반하여 ‘APEC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공동 프레임워크’를 채택한 것도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의 커다란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월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 도착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맞이하며 따뜻하게 악수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은 11월 1일 시진핑 중국 주석과 만나 한·중 전략적 협력 관계 발전 방안을 논의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실

글로벌 책임 강국에 부합하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 형성이 필요

2025년 6월 4일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낡은 질서가 퇴조하고 새 질서, 문명사적 대전환이 진행 중이라고 하면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통해 글로벌 경제·안보 환경 대전환의 위기를 국익 극대화의 기회로 만들겠다는 생각과 의지를 밝혔다. 이러한 대통령의 대외정책 추진 방향과 진짜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다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는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의 파노라마 곳곳에 묻어 있고 외교적 성과를 거둔 밑거름이 되었다.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의 역사적 의미도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대외 기조로 삼아 대한민국이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이 취임 연설에서 언급했듯이, 대한민국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 세계 10위 경제력에 세계 5위의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K-컬처로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나라로 발전해 왔다. 이제 대한민국은 한 차원 높은 국격을 표방하는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는 한국이 거둔 외교적 성과를 넘어 대내외에 글로벌 책임 강국 대한민국을 천명하고 당당하게 그 길을 걸어 나가 진짜 대한민국을 건설하겠다는 국민적 의지가 표출된 공간이자 시간이 되었다.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가 명실공히 대한민국이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시공간이 되었다면, 이제 우리는 이에 부합하는 국민적 준비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당당하면서도 꾸준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과 의지가 새로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글로벌 책임 강국에 어울리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확고하게 견지해 나갈 국민적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의 역사적 의미이자 향후 대한민국에 주어진 국민적·국가적 과제이다.

광복 80년과 분단 80년의 역사적 궤적에서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은 슬프게도 글로벌 책임 강국과는 맞지 않는 국가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지난 냉전 시대에는 반공 국가이자 동맹에 의존하는 허약한 국가 이미지가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주류를 차지했었다. 21세기에 들어와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많이 탈색되었지만, 아직도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강대국 경쟁 구도에 낀 체념적인 약소국 이미지가 국가 정체성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미지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형성해야만 대한민국은 복합 위기의 국제 정세에서 우리가 마주한 도전을 기회로 전환하고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 나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디딤돌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개회사에서 “APEC의 단단한 공동 번영의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이 경제 강국으로 우뚝 섰다”라고 밝혔다. ⓒ대한민국 대통령실

자강과 포용, 호혜적이고 수평적 국가 관계

오늘날 국제사회는 기존의 질서 구도가 거의 작동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매우 불안정한 과도기적 혼란과 혼돈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주축으로 펼쳐지는 강대국 경쟁의 안보적·경제적 긴장과 파동은 지역을 넘어 글로벌 지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상황에서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의 발전과 글로벌 책임 강국의 튼튼한 바탕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국가 정체성이 필요하다. 주권자인 국민의 바람과 의지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이를 국가 의지로 표출시켜 글로벌 책임 강국의 튼튼한 발판이 될 새로운 국가 정체성은 과거 어두웠던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은 물론 현재의 정세를 수동적이고 패배적으로 바라보는 정체성과도 완전히 달라야 한다. 분단국가에 따른 이념적 국가 정체성이 아닌 탈이념적이면서 다양한 이념의 스펙트럼을 탄력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실용적 사고, 안보적 두려움으로 점철된 동맹에 대한 의존적 사고를 벗어나 자주적이고 호혜성에 기반한 동맹 사고,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약자에게 오만하지 않은 자강과 포용의 태도, 대립과 갈등의 지정학적 긴장 구도에서 개방적이고 다자적 협력을 통해 대화와 평화 국면을 만들고자 하는 평화외교의 중요성, 복합 위기와 다양한 도전 상황에 굴하지 않고 이를 돌파하고자 하는 진취적 호연지기의 자세 등이 글로벌 책임 강국을 지탱하는 국가 정체성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구성 요소로 채워진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 정체성은 이의 대외적 표출이라 할 수 있는 외교 안보 정체성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알다시피, 한 나라의 외교 안보 정체성은 국제사회에서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조직하고 정의하며, 대외정책 관련 목표와 역할을 설정하는 방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 나라의 외교 안보 정체성은 국제관계에서 그 국가의 존재 이유, 국가 위상과 국격, 그리고 국가의 대외정책 방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외교 안보 패러다임의 정수이자 전략의 핵심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 거듭나는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 정체성은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에서 보여주고 입증했듯이 적극적이며 진취적 사고, 대외 관계에서 호혜적이며 수평적 국가 관계를 위한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외교로 채워져야 한다. 특히, 강대국 경쟁과 이익 수렴에 따른 강대국 협조가 강하게 작용하는 강대국 정치에서 호혜적 다자주의와 공동 상생을 위한 연대, 그리고 강자와 약자, 지역과 지역의 연결을 주도하면서 도전을 기회로 전환코자 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국민 정서와 의지를 담아낸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공고히 해 나가야 한다. 이번 경주 APEC 정상회의를 통해 보여준 대한민국의 저력과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미래 준비는 새로운 국가 정체성 형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베트남·호주·뉴질랜드·캐나다 정상들과 함께한 특별 만찬에서 세계적 복합위기 속 국가 간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대한민국 대통령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