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분단 80년:
통일을 넘어 ‘분단 이후의 시민’을 상상하다
분단은 남북의 이념 대립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의 불균형 속에서 비롯된 국제정치의 산물이며 그 흔적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통일의 당위를 되뇌는 일이 아니라 분단의 의미를 성찰하고 평화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분단 이후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통일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상상력과 평화공존의 문화를 모색해야 할 때이다.
분단의 현실을 상징하는 판문점의 풍경, 이제는 ‘분단 이후의 시민’과 평화공존의 문화를 모색해야 한다. ⓒ셔터스톡
광복 80년, 분단의 원인을 다시 생각하다
광복 80주년이자 38선이 처음 그어진 지 80년이 되는 해다. 반면 독일은 통일 35주년을 보내고 있다. 독일에게 통일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현재진행형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들의 과거로부터 미래를 상상하곤 한다. 그러나 그 상상 속에는 오래된 질문이 빠져 있다. 우리는 왜, 어떻게 분단되었는가라는 물음이다.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아침 햇살이 따뜻해 시내 야외 카페에 앉아 모닝커피를 시켰다. 손님은 우리 외에 젊은 커플 한 쌍뿐이었다. 인사와 함께 말을 건넸다. “이 동네에 사세요?” “아뇨, 여행차 왔어요.”
둘은 대학을 막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여성이 먼저 말했다.
“저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괴팅겐에서 일하는 게 1순위라 이곳에 지원하려고요.”
노벨상 수상자를 수십 명 배출한 학문의 도시답게 자부심이 묻어났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친구도 이곳에서 직장을 찾는지 궁금했다.
“저는 금융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유럽의 전통적 금융 강국인 스위스나 네덜란드에서 첫 직장을 시작하려고요.”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기껏해야 프랑크푸르트나 뮌헨 같은 독일 내 대도시를 떠올렸던 반면에, 대학을 갓 졸업한 이십 대 청년의 시야는 이미 독일을 넘어 있었다. 국경을 건너 일하고 살아가는 것이 마치 옆 도시로 출퇴근하는 일처럼 자연스러웠다. 대륙을 무대로 한 상상력, 경계를 넘어선 삶의 정체성—이들이 바로 ‘독일 통일세대’였다.
이 만남을 계기로 나는 고국의 현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의 청년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통일의 당위보다 ‘분단의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이 아닐까. 그 생각이 이어져 며칠 뒤, 막스플랑크연구원 세미나에서 있었던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한 동료가 내게 물었다.“너희는 일본에 식민화(colonization)되었던 거니, 아니면 합병(annexation)이었어?”나는 “둘 다 같은 거 아닌가?”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단호히 말했다. “아냐, 둘은 성격이 달라.” 세미나가 곧 시작될 참이라 “그럼 annexation이지”라고 짧게 답했다. 그랬더니 그는 “그래서 너희가 분단된 거구나!”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그 짧은 대화가 내게 남긴 것은 단순한 어학적 차이가 아니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남북 분단의 흔적을 전하는 베를린 장벽과 그 앞에 선 시민의 모습
ⓒ셔터스톡
분단의 성격을 이해해야 통일의 방향이 보인다
한국의 분단은 남북의 이념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의 불균형에서 시작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분할은 패전국의 귀결이었지만, 한반도의 분단은 식민지 해방의 역설이었다. 일본은 패전했으나 책임을 회피했고, 한반도는 해방되었으나 분할되었다.
일본인 역사학자 하세가와 쓰요시가 쓴 『종전의 설계자들』에서 우리는 한반도의 현대사 단추가 어떻게 처음 잘못 끼워졌는지 일말의 힌트를 얻는다. 비교적으로 보면, 독일이 명백한 ‘패전’으로 전후 질서 재편의 출발점이 된 반면, 일본은 ‘종전’이라는 표현 속에 패전의 책임을 희석시키며 전쟁의 종식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석은 동서독의 분단과 달리, 한반도의 분단이 식민지 해방의 불균형 속에서 비롯된 역사적 역설임을 암시한다.
이처럼 한반도의 분단은 민족 내부의 문제라기보다 국제정치 질서가 만들어낸 구조적 불평등의 결과였다. 냉전의 최전선이 된 한반도는 냉전체제하 최초의 열전(한국전쟁)을 치루어야 했고, 그 상처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독일의 분단은 내전 없이 점령으로 시작되어 화해의 서사를 품을 수 있었지만, 한반도의 분단은 전쟁의 상흔과 체제의 대립을 낳았다. 분단의 트라우마는 민주사회에서도 남남갈등, 젠더갈등, 세대갈등 등 공동체 내부의 대결 양상으로 파생되었으며, 사회적 신뢰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의 당위를 되뇌는 일이 아니라, 분단의 기원을 성찰하는 일이다. 왜 분단되었는지를 묻는 일은 단순한 역사적 반성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통일을 꿈꾸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출발점이 된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는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말하고 행위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여는 능동적 행위이다. 통일 역시 제도의 결정이 아니라, 시민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때문에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은 제도 개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세계(common world)’의 복원이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 철학은 통일을 단순한 제도적 통합이 아닌, 시민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능동적 과정이다. ⓒ위키피디아
마사 누스바움은 통일을 단순한 국가의 결합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인간다운 삶과
기회를 누리는 ‘역량의 평등’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본다. ⓒ위키피디아
달라진 세대, 달라진 통일 인식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젊은 세대의 통일 필요성 인식은 낮은 반면, 평화 유지의 중요성은 오히려 높게 나타난다. 이는 통일 담론이 ‘세계시민적 평화감수성’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청년 세대는 국경을 넘는 연대와 협력을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통일을 ‘국가적 목표’보다 ‘공존의 가치’로 이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사 누스바움은 “모든 품위 있는 사회는 공감과 사랑의 정서를 적절히 함양함으로써 사회적 분열과 계층의 분리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고 했다. 서로의 상처를 공감하고 연민할 때, 제도 너머의 평화가 시작된다. 통일은 영토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확장하는 과정이다. 누스바움의 ‘역량(capabilities)’ 개념처럼, 남과 북 모두가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통합이다.
이제 통일교육은 ‘이념적 통일의식’이 아니라, 평화·통일·민주시민교육으로 발전해야 한다. 정부가 추진하는 새로운 방향은 통일을 민주주의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평화를 배우고, 논쟁을 토론하며, 시민이 직접 정책을 제안하는 구조—이것이 바로 한반도 통합을 위한 사회적 역량의 토대다.
평화공존과 번영의 한반도, 사회적 대화의 시대
현 정부의 국정과제인 ‘평화공존과 번영의 한반도’는 대결이 아닌 협력, 단절이 아닌 상생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는 남북한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며 함께 번영하는 한반도 공동체의 비전을 뜻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한반도 평화·통일정책 추진」을 통해 세 가지 방향을 제시했다.
첫째, 대북·통일정책에 대한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하고,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일이다. 정부·국회·시민사회가 협력하는 개방적 대화 기구를 통해 다양한 의제와 방식으로 의견을 모으고, 국민 제안을 정책화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한다.
둘째, 평화·통일 담론의 생산과 확산을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체계를 마련한다. 청년·여성의 참여, 지역별 통일플러스센터 운영, 민간 연구 생태계 강화 등이 그 핵심이다.
셋째, 통일교육을 평화·통일·민주시민교육으로 발전시키고, 학교·지역사회·디지털 플랫폼에서 평화문화를 일상 속에서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한국적 맥락에서 구현하려는 시도, 일명 ‘K-보이텔스바흐 합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대화와 시민참여는 정부나 특정 조직의 몫이 아니다. 지역의 주민, 교사, 시민단체, 청년세대 등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구조여야 한다. 민주평통 위원들은 그중 한 예로, 지역 현장에서 대화를 촉진하고 공존의 언어를 확산시키는 퍼실리테이터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만큼 평화공존의 문화는 특정 집단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공동의 과제다.
지난 9월 23일, 통일부에서는 「국민과 함께하는 한반도 평화·통일정책 추진」을 통한
방향을 제시했다. ⓒ통일부
분단 이후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
통일은 더 이상 국가 단위의 거대 담론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 속에서 실천되어야 할 문화적 과정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탄생성(natality)’—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능력—처럼, 분단 80년의 한반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 희망의 씨앗은 거대한 정치가 아니라, 평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시민에게 있다.
교육의 목적은 국경 안의 충성심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서, 인간 전체를 향한 공감의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생애사 나눔을 통해 동서독 주민 간의 화해, 구동독 내 비밀경찰과 탄압받은 자들 간의 용서와 치유를 실천한 괴델리츠 선생의 동서포럼처럼, 이제는 우리 안에서부터 분단을 치유하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며, 함께 번영하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평화공존과 번영의 한반도’, 이 비전은 통일의 종착점이 아니라, 우리가 분단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이다. 광복 80년, 분단 80년의 교차점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분명하다. 통일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떤 시민으로 분단 이후의 시대를 살아갈 것인가. 그 질문이야말로, 이 시대의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다.
지역 시민이 중심이 되어 평화·통일 담론을 확산하는 인천통일플러스센터의
교육 현장 ⓒ인천통일플러스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