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알이 여문 평화와 통일의 오대쌀
통일쌀 경작과 벼베기 행사를 통해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되새기는 철원군농민회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남북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한다. 철원 접경지 농민들이 모여 만든 농민단체인 철원군농민회가 선택한 방식은 ‘통일쌀 경작’이다. 아울러 농사지은 통일쌀을 시민들과 함께 추수하는 행사를 개최하고, 쌀 판매 수익을 일본 조선학교에 기부하며 한반도 평화통일의 씨앗을 정성껏 뿌리고 있다.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내에 있는 강원 철원군 철원읍 내포리 ‘통일 쌀 경작지’ 주변에 설치된 한반도 모양의 조형물. ⓒ철원군농민회 제공
평온한 들판에 상존하는 분단의 상흔
철원의 번화가 중 한 곳인 동송읍내를 지나 약 5분간 북쪽으로 차를 움직이면 금강산로와 만난다. 이 길은 이름 그대로 금강산을 향해 뻗어나가게끔 조성됐지만, 지금은 노동당사삼거리에서 허리가 반쯤 끊긴 상태다. 민간인 출입통제선(이하 민통선) 안쪽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과 미리 허가를 받은 외부인만이 군 검문소 너머의 금강산로를 마저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길 안내를 자처한 위재호 철원군농민회장이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문소를 통과한 뒤 3㎞ 정도만 더 가면 우리 농민회가 운영하는 통일쌀 경작지가 있습니다. 1,300㎡(약 400평) 규모로 그리 크진 않지만, 80㎏짜리 8가마 분량은 넉넉히 나오는 기름진 땅입니다. 여기까지 오셨으니 직접 경작지까지 가서 사진과 영상을 찍으면 좋을 텐데, 촬영 허가가 쉽게 나지 않으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대신 위재호 회장은 인근에 자리한 백마고지 전적지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철원군 산명리에 위치한 이곳은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백마고지(395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국군과 중공군이 처절하게 싸운 끝에 방어에 성공한 백마고지 전투의 전과와 당시 군인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조성됐다. 위재호 회장이 “전망대까지 오르면 민통선 내 철원평야가 내려다보인다”며 양편으로 태극기가 나부끼는 언덕길로 향했다. 백마고지 위령비와 기념관을 지나 옷 안쪽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 백마고지 전승탑과 추수를 마친 너른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위재호 회장이 “종종 이곳으로 산책을 온다”며 눈앞의 풍경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오른쪽에 보시면 논 한가운데 솟은 산등성이가 보이는데요.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어서 세자매봉이라고 부릅니다. 통일쌀 경작지는 세자매봉 뒤에 있어서 이곳에서도 보이지 않지만, 여기서 직선거리로 3~4㎞ 정도밖에 안 됩니다. 바로 앞에 좌우로 길게 뻗은 제방은 민통선 경계입니다. 이쪽에서는 완만한 둔덕 같이 보이는데, 반대편은 돌을 직각으로 쌓아서 올린 꽤 높은 장벽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유사시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이른바 ‘탱크 장벽’이죠.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들판이지만, 그 안에는 분단의 아픔과 흔적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백마고지 전망대에 올라 통일쌀 벼베기 행사 장소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주는 위재호 철원군농민회장.
20년 넘게 꿋꿋이 이어 온 통일쌀 사업
철원군농민회의 통일쌀 사업, 그 시작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을 돕기 위해 통일쌀 보내기 운동을 개시하자, 철원군농민회에서도 기꺼이 동참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2007년부터는 철원군농민회 자체적으로 통일쌀을 경작해 북으로 보냈으며, 2010년 민간 차원의 대북 지원이 중단된 이후에는 통일쌀 판매 수익금을 다방면의 남북 관계 개선 활동에 활용해 왔다.
“남북 관계 경색 국면이었던 2023년에는 일본에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조선학교에 통일쌀 판매금을 기부했는데요. 2024년에는 당시 정부의 강경한 대북 기조 때문에 그마저도 어려워져서 후원을 멈추고 수익금을 적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원군농민회와 뜻을 함께하는 외부 단체 회원들과 진행하던 통일쌀 벼베기 행사에도 어려움이 뒤따랐다.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하고 참여하는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민통선 출입 절차는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졌고, 행사를 진행하는 내내 무장한 군인들이 경작지 사방에서 보초를 섰다. 자연스럽게 벼베기 행사 분위기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언젠가는 상황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꿋꿋하게 통일쌀 사업을 이어 왔다는 게 위재호 회장의 이야기다.
“24시간 울려 퍼졌던 대북·대남 방송도 고역이었습니다. 모내기를 위해 논을 갈고 물을 대는 시기부터 벼베기 행사 철에 이르기까지 갖은 소음이 끊이지 않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벼베기 행사를 진행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도 했지만, 평화와 통일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겠다는 철원 농민들의 의지와 여기에 보탬이 되겠다고 나서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막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진심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올 초까지만 해도 귓속을 파고들었던 대북·대남 방송은 지난 6월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올해 통일쌀 벼베기 행사 참여 인원에 대한 검문 절차는 작년에 비해 완화됐고, 경작지 주변을 순찰하던 중무장 군인들도 자취를 감췄다. 위재호 회장은 “덕분에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좋은 분위기 속에서 행사를 진행했다”며 활짝 웃었다.
철원군 산명리에 자리한 백마고지 전적지는 1952년 격전의 백마고지 전투 승리를 기념하고, 그날의 희생과 용기를 기억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백마고지 위령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아군과 중공군 등 17,535명의 영혼을
진혼하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이다.
우리의 삶과 직결된 현안, 평화와 통일
대북·대남 방송은 인근 주민들의 일상에도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 철원평야에는 이렇다 할 산맥과 높은 산이 없다 보니 방송 소리가 민통선 내의 논밭을 넘어 동송읍내까지 잘 들렸다. 방송이 크게 들리는 과수원에는 새 쫓는 소리를 내는 기계를 따로 설치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으며, 일부 축산 농가는 기르던 동물이 유산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생활 소음이 잦아든 고요한 밤에는 방송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통에 잠을 설치는 주민들도 많았다. 농사를 지은 지 10년이 됐다는 철원군농민회 임국현 회원은 당시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커다란 소음 속에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분들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신경이 곤두선 채로 매사를 처리해야 하다 보니 심신의 스트레스와 피로감이 대단히 컸는데요. 대북·대남 방송이 전격적으로 중단되니 그 자체로 삶의 질이 한결 높아졌습니다. ‘평화는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걸 새삼 실감했고, 평화와 통일을 위해 애써 온 농민회의 일원이라는 게 더욱 자랑스러워졌습니다. 올해 통일쌀 벼베기 행사에 참여한 독일인 유학생들도 ‘주민들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평화와 통일 활동에 나선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라는 소감을 남겼는데요. 덕분에 ‘우리 농민회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남다른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라는 자부심과 사명감도 생겼습니다.”
남북의 평화 공존을 위한 새 정부의 실질적 노력은 지난 몇 년간 얼어붙었던 철원군농민회의 마음을 서서히 녹이고 있다. 지난 8월 19일 국회도서관 대회의실에서 개최된 ‘접경지역 농업·농촌·농민 권리 회복을 위한 법·제도 개선 토론회’를 눈여겨본 대통령실에서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과 면담을 진행한 것. 특히 두 번째 면담은 접경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군 관계자들이 참석했는데,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불합리한 규제 등을 개선하겠다고 밝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고 위재호 회장은 말했다.
“그간 움츠러들었던 통일쌀 관련 사업도 확대할 계획입니다. 우선 작년과 올해의 통일쌀 판매 수익금을 일본 조선학교에 기부할 예정이며, 앞으로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통일쌀이나 그 수익금을 북한 주민들에게 전달할 생각입니다. 지자체 및 유관기관과 협업해 통일쌀 경작지와 벼베기 행사 규모를 키울 수 있는 방법도 모색 중인데요. 우리 농민회는 남북 분단과 대립이 미래 세대에게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평화와 통일 관련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위재호 철원군농민회장은 군사적 제약 속에서도 평화와 통일의 뜻을 잇기 위해 통일쌀 벼베기 행사를 꿋꿋이 이어왔다고 말했다.
임국현 철원군농민회 회원은 소음 속에서도 벼를 키워온 시절을 떠올리며, 지금은 평화와 통일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농민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전했다.
작년 10월 5일, 강원 철원군 철원읍 내포리 ‘통일 쌀 경작지’에서 열린 ‘통일 쌀
벼베기’ 행사에 참석한 독일 튀빙겐대학교 학생들이 벼 베기를 마친 후 새끼줄 꼬기 체험을 하고 있다. ⓒ철원군농민회 제공
지난 5월에 열린 철원군 통일쌀 모내기 행사에는 여러 시민과 농민이 함께하여
희망의 싹을 심었다. ⓒ철원군농민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