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길에서 만나는 통일 ⑥ 서해 서해랑길-인천 중구
바람은 역사를 품고
평화는 걸음 따라 흐른다
서해랑길 96코스 시작점에서 인천 중구청 방면으로 100여 m쯤 달렸을까. 새 문물을 맞이한 개항지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6·25전쟁의 아픔이 공존하는 굵직한 역사 현장에서 일상을 보내는 이웃들의 얼굴은 평온하다. 인천항이 한눈에 보이는 새파란 바다와 산업단지를 배경으로 들어선 각종 전적비는 기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한낮 기온이 영하 2도를 기록한 12월 중순 오후, 인천 중구 곳곳에 깃든 평화의 기운을 찾아보는 재미에 추위도 잊어버렸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공원인 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 동상.
서해랑길 96코스는 곧바로 응봉산 전체를 아우르는 자유공원 입구로 이어진다. 응봉산 자유공원을 오르는 길에는 유방과 항우의 대결을 다룬 초한지(楚漢志) 벽화가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마지막 대전인 하해전투와 항우와 연인 우희의 마지막 이별(패왕별희) 장면을 담은 벽화를 지나면 자유공원의 돌계단이 나타난다.
자유공원이 통일·안보 현장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방문객들은 통일부 국립통일교육원이 선보인 첨단 현장형 통일교육 프로그램 유니투어(UniTour) 애플리케이션 홍보 배너를 보며 기념 촬영과 인증을 하기도 한다.
▲ 석근창(91) 씨와 이영화(96) 씨는 6·25전쟁에 참전한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인천중구지회 소속 참전유공자들이다.
▲ 6·25전쟁의 역사 현장을 재조명하며 각광받고 있는 인천학생6·25참전관.
전쟁 기념비와 인천항의 묘한 조화
1888년, 인천항 개항 초기 외국인 거주자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한 자유공원은 서울 최초의 근대공원인 탑골공원보다 9년 앞섰다. 이후 1957년, 미국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기 위해 동상이 건립되면서 자유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동상 주변 등나무를 오가며 산책하는 노인들의 모습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공원 팔각정에 오르니 매서운 바닷바람 속에서도 멀리 인천항과 월미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쟁을 기념하는 전적비와 강제 개항의 상징인 인천항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풍경을 자아낸다.
꾸준한 확장 작업을 거쳐 현재에 이른 자유공원의 중간 지점에서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세기 개항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운요호 사건(1876)을 빌미로 맺은 강화도조약으로 부산(1876), 원산(1880)에 이어 개항한 인천(1883)은 그 역사만큼이나 대불호텔, 홍예문, 내동 성당, 제물포 구락부,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인천기상대 창고 등 근대식 건축물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등 여러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매력을 더한다.
매서운 바람을 헤치며 해발 69m의 야트막한 응봉산 일대 자유공원을 걸으며, 전쟁과 평화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자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이제 ‘평화의 공원’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다. 지역주민인 이현덕(67) 씨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는 와중에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면서, 6·25전쟁 당시 나라를 수호한 선국 열사들의 정신을 기리며 평화를 기원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더욱 많아졌다”며 “자유공원이 이제는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자유공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신포국제시장을 지나면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인천중구지회에 다다른다.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는 6·25전쟁 참전 영웅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바탕으로 설립한 보훈단체로,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해왔다. 이 단체는 1990년 사단법인 6·25참전동지회로 인가받았으며, 2001년 국가보훈처로부터 법인 설립 허가를 받은 데 이어 2008년 국가유공자로 공포·지정됐다.
인천중구지회는 회원과 시민의 안보의식 제고를 위해 매년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초·중·고 학생과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6·25전쟁 바로 알리기’ 교육을 실시해 전쟁의 참상을 알리며 국가 안보 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쓰고 있다. 또한 국경일에 태극기 달기 실천 운동을 통해 순국선열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회원들의 권익과 복지 향상을 위해 상조회를 조직해 참전유공자의 장례를 지원하는 활동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죽지 않으려 발버둥쳤더니 전쟁 끝나”
이곳에서 만난 이영화(96) 씨와 석근창(91) 씨는 각각 백마고지 전투와 인천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전했던 유공자들이다. 두 사람은 당시 15~16세는 소년병으로, 13세 이상은 학도병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들은 어린 나이에 간단한 훈련만 받은 채 전쟁터로 투입돼 싸워야 했던 어려움을 전했다. 이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에 참전하고 싶어 했던 10대 중반의 청소년이 어디 있겠어요. 하루아침에 적군이 남한으로 쳐들어오니 어쩔 수 없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훈련을 받고 참전하게 된 거죠. 전쟁이 시작되니 총알이 빗발치는 그곳에서 어떻게든 이겨야 살 수 있겠더라고요. 그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더니 어느새 전쟁이 중단됐더군요.”
석 씨는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숱한 고생을 했죠. 그래도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살게 된 걸 보면 뿌듯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싸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게 느껴져요.”
그러면서 그는 젊은 세대가 철저한 안보 의식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살벌한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가족을 잃는 비극은 이제 더는 없어야 하지 않겠나요.”
어르신들의 배웅을 받은 뒤, 인천 중구 신포동 시내로 이동했다. 이곳에는 인천학생6·25참전관이 치과 건물 1층에 자리 잡고 있다. 참전관 관장은 인천 학도병 출신인 고(故) 이경종 씨로, 그는 학도의용군의 역사를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50년 6월 26일 저녁, 인천지역 학생연맹(학련, 學聯) 학생과 학도호국단 소속 학생 40여 명은 이계송(당시 고려대 2학년) 씨의 집에 모여 인천학도의용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7월 4일, 북한군이 인천을 점령할 때까지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을 안내하고 학생 선도활동을 벌였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이 수복되자, 흩어졌던 조직을 다시 정비했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중국군이 참전하며 전세가 불리해지자, 12월 18일 인천 중구 축현국민학교에 5000여 명이 모여 행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수원역에서 화차 지붕에 몸을 싣고 부산에 도착했고, 일부는 해병대원으로, 대다수는 보병으로 전투 현장에 투입됐다. 그중 208명은 전투에서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이경종 씨는 학도의용군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역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함께 참전했던 선후배들을 한 명씩 찾아다녔다. 그는 당시 상황을 녹음으로 남기고, 오래된 사진과 자료를 수집하며 과거를 되살렸다. 그의 아들 규원 씨의 도움으로, 1997년 2월 ‘인천학도병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6·25전쟁 당시 학도의용대의 희생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
꽃다운 나이에 생 마감한 학도병들
2004년 12월 18일, 인천학생6·25참전관이 인천 중구 내동 인근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이후 네 번의 이전 끝에 2016년 5월 지금의 자리로 이전해 재개관했다. 현재 건물 1층은 전시관으로 사용되며, 2층에는 치과의사로 일하는 아들의 병원이 들어섰다.
이 참전관은 현재 6·25전쟁 현장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관람객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소개하는 영상을 시청하며 역사 공부를 할 수 있고, 상시 운영되는 분향소에서 호국영령 소년병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까지이며, 공휴일은 휴무다.
전시관에는 당시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빛바랜 사진 1000여 점과 각종 기록물이 전시돼 있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지만, 어린 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의용대원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들을 보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학도의용군 대부분이 14~18세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가슴이 먹먹했다.
상설 전시실에서는 6·25전쟁의 흐름과 인천상륙작전의 의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전쟁에 참전한 학도병들의 사연이 담긴 일기장과 편지, 전쟁에서 사용된 물품들은 ‘아픈 역사와 우리의 희생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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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은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인천 학도의용대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며, 후세에 나라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세워졌다. 기념탑 뒤편 돌판에는 당시 의용대원으로 활약한 이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1950년 12월 19일, 인천 학도의용대 3000여 명은 축현초등학교에서 출정식을 갖고 마산으로 남하했다. 이들은 해병대와 육군에 자원입대해 수많은 전투에서 싸우며 200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냈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은 자유와 평화가 결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맥아더 장군 동상 & 맥아더 길
맥아더 장군 동상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념해 1957년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로웠던 시점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끈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인천시는 상륙작전의 주요 전장이 내려다보이는 자유공원에 동상을 건립했다. 맥아더 길은 인천 중구 월미도 입구에서 자유공원 동상까지 이어지는 1.75km 구간으로, 맥아더 장군의 이름을 따 2015년 명예도로로 지정됐다.
몽금포작전 전승비
몽금포작전 전승비는 대한민국 해군이 1949년 8월 17일 감행한 몽금포 작전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전승비는 가로 13m, 세로 10m, 높이 7.4m로, 당시 특공대원들이 JMS302(통영)호를 타고 몽금포항으로 진격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몽금포 작전은 북한군의 계속된 도발에 대한 응징으로, 당시 우리 해군은 함정 6척과 특공대원 20명을 파견해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하고 1척을 나포했으며 북한군 5명을 생포했다. 이 작전은 대한민국 해군의 첫 대북 응징 작전으로, 군사적 결단력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맥아더 길 명예도로는 인천 중구 월미도 입구에서 자유공원 맥아더 장군 동상까지 1.75㎞ 구간을 연결한다.
글 · 김 건 희 기자 사진· 박 해 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