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평화
재일조선인 2세가 펴낸 장편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
“자유를 위한 고난이라면
도전해볼 가치가 있다”
‘자이니치’. 일본에 사는 한국인 또는 조선인을 지칭하는 단어다. 우리에겐 ‘재일(在日)’이란 단어로 익숙하다. 일본에서 살지만 결코 일본인으로 살 수 없는, 같은 한민족이면서 한국인과 조선인으로 나뉘어 살아야 하는 슬픈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이 중에서도 사상과 행동을 철저히 감시당하면서 폐쇄적인 학교와 조직에서 살아온 ‘재일조선인’의 이야기가 소설로 나왔다.
작가는 북한체제에 갇힌 재일조선인 가족사를 ‘디어 평양’(2006년)과 ‘굿바이 평양’(2011년),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년) 등 다큐멘터리 3부작을 만든 양영희 감독. 세 작품 모두 실제 자신의 가족 이야기다. ‘디어 평양’은 2006년 선댄스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2021년 DMZ다큐멘터리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대상을 받았다.
일본 도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북한
소설 ‘도쿄 조선대학교 이야기’(마음산책) 역시 자신이 조선대학교를 다니면서 직접 체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가상의 요소를 더해 썼다. 양 감독은 “연극을 사랑하는 대학생 주인공 박미영은 1964년생인 나 자신을 모델로 삼았고, 그녀가 청춘을 보낸 1980년대 도쿄의 모습을 그리움을 담아 충실히 재현했다”고 설명했다.
양 감독은 평생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활동에 헌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다. 위로 오빠 세 명이 있었지만, 그가 여섯 살 때 모두 북한으로 이송돼 평생 돌아오지 못했다. 북한이 1959년부터 시작한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의 일환이었다. 조총련에서 운영하는 조선학교 유치반과 초·중·고급학교를 거쳐 조선대학교 문학부에 입학한 양 감독은 오사카조선고급학교에서 국어(조선어) 교사로 2년 반 정도 일했다.
소설 속 주인공 박미영 역시 조선대학교 문학부 학생이다. 세 명의 오빠 대신 언니 부부가 북송됐다는 설정이 조금 다르다. 책 서두에 이런 글귀가 있다. ‘내일은 선택의 자유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자유를 위한 고난이라면 도전해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현재의 미영이 바에서 여대생들의 졸업 여행 이야기를 듣고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잘못 온 것 같아.” 조선대학교 입학식 날, 몇 번을 지워도 다시 튀어나오는 마음의 소리. 미영은 졸업 후 극단에 들어가리라는 원대한 꿈을 안고 도쿄의 조선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의 기숙사 생활에 매일같이 이어지는 자기반성과 상호 비판, 졸업 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정해지는 진로까지, 학교는 일종의 감옥과도 같았다.
“매일 하루 총화. 토요일 밤에 주 총화. 월말에 한 달 총화. 우리는 이미 참회 전문가야.”
미영은 조직의 억압에 반발하고 동급생과 마찰을 일으키는 등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히면서도 자신을 굽히지 않는다. 한편으로 옆 학교인 무사시노미술대학의 일본인 남학생 구로키 유와 만나면서 담장 너머의 ‘자유’에 충격을 받는다. 미영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극과 영화였다. 조선대학교에 온 목적은 도쿄에서 4년간 마음껏 연극을 관람하고, 졸업 후에 들어갈 극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교 진로지도 때 자신을 괴롭혔던 선생들을 동경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선생 같은 건 자기 가치관을 남에게 강요할 수 있는 오만한 종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접한 대학생활은 끔찍했다.
작품 안에서 북한으로의 졸업 여행은 비중 있게 다뤄진다. 미영은 음악가인 친언니 미희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 하나로 졸업 여행에 참가하지만, 평양에서 언니를 만나지 못한다. 언니와 함께 평양 악단 단원이었던 형부의 말실수 때문에 중국 접경 지역인 신의주로 추방당한 것이다. 낙담하던 미영은 친구의 조언에 따라 실상은 감시자인 최 지도원을 매수해 열차를 타고 신의주로 향한다.
“너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
미영은 정차 역에서 영양실조에 걸린 모자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짐짝처럼 다뤄지는 북한 주민들을 보며 낙원이라던 ‘조국’의 참혹한 현실에 경악한다. 어렵게 만난 언니는 자기비판과 구타로 정신을 놓아버린 남편을 두고도 부모과 조국을 향한 원망보다 어떻게든 평양으로 돌아가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미영에게 “행복해지는 게 네 의무”라며 더 이상 허울뿐인 조국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 살아가라고 당부한다.
“공부도 연애도 마음껏 해! 미영이는 나처럼 되면 안 돼. 너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어. (…) 너는 내 분신이니까. 내 몫까지 행복해져야지! 조직이라는 둥 가족이라는 둥 바보 같은 말을 하면 용서 안 할 거야.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 알았지? 조선에서 살아가는 삶도 벅차지만, 이 나라를 짊어지고 일본에서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을 거야.”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미영은 만연한 성차별과 더불어 학교 안에서는 전체주의, 바깥에서는 배타주의에 맞서며 꿈과 사랑을 밀어붙인다. 저자는 자신을 투영한 미영이라는 인물의 눈으로 조선대학교라는 조직의 내밀한 단면과 재일조선인이 처한 현실, 북한 주민들의 참혹한 실상까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겪어본 자만이 가능한 구체적인 묘사는, 일종의 증언으로 작품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2018년 일본에서 출간한 이 소설은 올해 3월 우리나라에서 한글 번역본으로 출간됐다. 조해진 소설가는 추천평에서 “민족이나 이념보다는 자신의 꿈과 사랑을 찾아가고 싶었던 양영희의 페르소나, 박미영의 서사를 환영한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