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12023.07.

서울시청 앞 서울도서관 꿈새김판에 걸린 정전협정 70주년 기념 문구 ‘정전 70주년, 당신은 영웅입니다’.
6·25전쟁 참전 용사들을 기억하고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았다.(뉴시스)

진단

정전협정 70주년, 한반도 평화와 통일 어디로 가는가?

미래의 남북관계 · 한반도 안보 의식
공동체 통해 MZ세대와 함께 나누고 만들어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에서 제한적으로 작동하던 근대 국제질서는 전 세계 곳곳으로 급속도로 확산됐다. 1945년 유엔 설립 당시 51개국에 머물던 가입국이 현재 193개국으로 늘어난 점만 보더라도, 서구식 개념에 기초한 주권국가 숫자가 초기 전후 질서에서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 민족과 지역은 고유한 주권국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형을 보였다. 우리나라와 독일, 베트남 등은 같은 민족이지만 국제정치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분단을 겪은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학문적 관점에 따라 중국과 예멘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나라가 ‘하나의 중국’을 존중하는 입장이니 중국을 분단 상황으로 이해하는 건 옳지 않고, 예멘 역시 국제정치적 요인 이외에 종교적 갈등이 복잡하게 겹쳐 있어 이런 사례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의도하지 않은 논쟁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독일, 베트남, 이렇게 세 국가 사이에서도 상당한 차별성이 발견된다. 우리나라는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치른 유일한 사례다. 베트남도 전쟁을 치렀지만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미국과 벌인 전쟁으로, 전선이 분명했다. 반면 6·25전쟁은 동족 간 대규모 이념전쟁이었다.

파도처럼 ‘성과와 실패’ 끊임없이 되풀이돼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진 지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했다. ‘휴전협정’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협상 참여를 거부한 당시 우리 정부의 결정에 따라 한반도 당사자로는 북한만이 협정에 서명했다. 당시 북한이 발간한 국문 번역본에도 ‘정전협정’이라고 표기돼 있다. 대체로 전쟁 행위의 중단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면 ‘정전협정’이 올바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70년 동안 남북한 사이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사건이 있었다. 글로벌 차원의 데탕트(동·서 진영 간 긴장 완화)가 한반도에 수용된 ‘7·4남북공동성명’도 있었고, 유신 이후 처음으로 직선제로 선출한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과 ‘북방정책’도 경험했다. 1991년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체결됐을 때는 마치 한반도 통일이 손에 잡힐 듯한 착각에 빠진 적도 있었고, 영변 핵시설로 상징되는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이후에는 남북한 간 대결과 협상이 파도처럼 반복됐다.

성과와 실패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답답한 과정이 이어졌다. 특히 북한 문제 및 남북한 관계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속성과 결합하는 정도가 매우 심해서, 언제부터인가 북한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한국 사회의 이념적 지표를 결정하는 기준점이 됐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경제적 고통과 외교적 고립을 ‘핵 개발’로 타개하고자 시도한 북한 정권의 의지 때문에 우리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북핵 문제는 현 시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상징하는 핵심 이슈가 돼 있다. 북핵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던 과거와 달리, 적어도 현재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북한의 핵 개발 초기 ‘핵은 외교적 협상 수단’ 혹은 ‘핵보유국으로 가기 위한 수순’인지를 놓고 벌였던 다양한 논쟁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 스스로 핵 무력이 고도화될수록 북한의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으니, 협상의 접점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전협정 70년의 시점에서 이처럼 남북관계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경색돼 있고, 북한이 다른 어떤 국가이익보다도 핵 개발에 몰두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정치지도자, 정책결정자, 연구자, 언론인, 시민사회, 그리고 일반 국민은 각자의 관심에 따라 지난 70여 년의 남북관계 역사에서 서로 다른 교훈을 얻고자 할 것이다. 각자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지난 70년의 역사에서 대체로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고자 한다.

1992년 2월 19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정원식 남측 총리와 연형묵 북측 총리가
양측 국내 절차를 마친 ‘남북기본합의서’를 교환 발효시켰다. (동아DB)

첫째, 한반도 분단 상황은 국제 안보환경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일견 너무도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한반도가 안고 있는 ‘국제성’은 한국의 국가 정체성과 연관돼 있다. 지리적 조건, 경제 상황, 사회문화적 특징은 물론이고, 정전협정 70년의 위기와 대화가 반복될 때마다 그 반복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변수는 국제 상황이었다.

7·4남북공동성명을 가능케 한 데탕트, 남북기본합의서를 가능케 한 냉전 종식, 햇볕정책을 가능케 한 클린턴 행정부의 민주주의 외교, 6자회담을 가능케 한 중국의 성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싱가포르와 베트남에서 두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가능케 한 동력이야말로 국제환경 변화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북미 정상회담을 설명하는 독립변수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본격적으로 전개된 미중 갈등의 구조화를 계기로 북한은 강대국 대결이 요동치는 안보환경이야말로 스스로 생존을 확보하는 최적기로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기존 정치적 관행과 전혀 다른 행태를 보인 ‘트럼프 효과’도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둘째,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70년의 역사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교훈은 ‘기능주의’의 한계이다. 예를 들어 햇볕정책은 전형적인 기능주의 대북정책이다. 경제적 지원과 같은 하위정치(low politics)가 상위정치(high politics)를 변화시켜줄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진보 정부는 물론 보수 정부 역시 기능주의 대북정책에 의존했다. 과거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이나 박근혜 정부의 ‘통일 대박’ 모두 북한을 경제와 지원의 대상으로 설정했다는 차원에서 기능주의적 접근에 기인했던 것이다.

수십 년의 경험에서 보듯이 경제적 지원이 비핵화나 북한 변화와 같은 정치안보 영역으로 전환되는 ‘전환 효과(spill-over effect)’는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전환 효과 부재의 원인에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미래 남북관계의 어느 단계에서는 기능주의적 정책이 의미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신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 상황에서 기능주의적 정책은 실효성을 발휘하기 어려워 보인다.

북한 문제는 내치(內治)인가 외치(外治)인가?
향후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은 어디로 갈 것인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방향성 설정을 위해서 두 가지만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기본적으로 안보(security)는 사회 안에서 구성원들 간 혹은 다양한 가치 간 경쟁을 통해서 확인되고, 또한 확보된다. 한반도 문제의 특성상 지금까지 대북정책과 관련한 안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최고지도자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경향이 강했다. 한반도 안보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와 정부 역할이 가지는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현재와 같은 안보 논의 방식으로는 점차 통일에 관심을 잃어가는 MZ세대의 세계관을 포용하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머지않은 장래에 통일에 무관심한 정당이 출현할 수도 있고, 혹은 유사시 북한을 상대로 무력을 행사해야 하는 절박한 시점에서 전쟁과 통일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젊은 세대가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사전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와 한반도 안보에 대한 논의가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으로 구성(social construction)’돼야 한다. 사회적 구성은 논의의 ‘개방 및 자유’와는 다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2월 28일(현지시간)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 회담장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하노이=AP/뉴시스)

다음으로 대북정책과 국내정치 사이에는 건강한 균형감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북한 문제를 때로는 국내정치 사안으로 접근하고, 때로는 외교 안보 사안으로 접근하는 불안정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북한 문제는 내치(內治)인가 외치(外治)인가? 이 질문에 정답은 없어 보인다. 내치로 접근한다면 노력에 비해 성과가 크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가 안고 있는 국제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치의 차원에서는 북한의 비이성적인 논리와 위장 전술 역시 쉽지 않은 난제가 된다. 외치로 접근한다면, 이 역시 핵 문제가 모든 이슈를 가로막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남북관계 발전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핵 문제 해결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북한 문제의 다양한 측면이 핵 문제에 가려져 ‘핵 환원주의’에 함몰되지 않을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 앞으로 몇 해나 더 지속될지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는 반복되지만 또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대전환의 시기를 맞이해 한반도 문제에 대한 좀 더 창의적이고 포괄적인 고민이 필요한 때다. 한반도 분단 역사에서 일궜던 성과들이 아쉽게도 대부분 사문화되었거나 무용지물이 된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과거 성과들은 남북한 모두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박 인 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한국국제정치학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