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12023.07.

글·엄상현 기자 사진·조영철 기자

통일비전

北 ‘5대 명산’ 자유롭게 오갈 날 그린다

이정수 백두산·금강산 전문 사진작가

이정수 사진작가는 1945년생 ‘해방둥이’다. 태어난 곳은 경기도 용인.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고 60년대 초반 서울로 올라와 이런저런 일을 시작했다. 북한과의 인연은 전혀 없다. 그런 그가 어떻게 백두산과 금강산 전문 사진작가가 됐을까? 그가 꿈꾸는 통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이런저런 궁금증을 안고 서울시내 한 호젓한 야외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다섯 살이던 그에게 혹시 전쟁에 대한 기억이나 사연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 시절 피란길에 가족을 잃거나 이산가족이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전쟁 통에 여기저기 옮겨 다닌 것 같긴 한데, 보리가 익을 무렵 오디 따 먹은 기억밖에 안 나는 것 같아요. 새까만 오디 있잖아요. 너무 어려서….”

그의 나이 올해로 78세. 그로부터 벌써 7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이 작가는 책 외판원부터 시작해 화랑 미술디렉터, 전시 기획자 등 다양한 일을 해왔다. 그런 그가 카메라를 잡게 된 건 순전히 산 때문이었다.

“제가 젊은 시절부터 등산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산을 오르면서 접한 자연의 오묘한 자태, 다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게 너무 아쉽더라고요. 카메라에 좀 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당시 유명했던 라이카M6 카메라를 사서 찍기 시작했죠.”

“백두산, 그 장엄하고 웅장한 풍광이란…”
이런 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1970년대 초, 마침 그가 미술디렉터로 일하던 ‘문화화랑’ 대표가 사진작가로 유명한 문선호(1923~1998)였다. 문선호는 원래 화가였다. 1950년대 중반 무렵 사진작가로 진로를 바꾼 후 75세의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사진 작업에 매진하면서 ‘카메라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유명작가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지만, 함께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기엔 충분했다.

그 시절, 이 작가는 국내 유명화가들의 작품 전시를 주로 기획했다. 이중섭, 최영림, 박영선, 장리석, 박수근 등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서양화가들의 전시였다. 대부분 북한 출신으로 6·25전쟁을 피해 남하했거나 일본 유학파 또는 조선미술전람회 입상자들로, 북한 평안남도 출신인 문선호와 가까운 지인들이었다. 미술계에 발을 들인 이 작가는 자연스레 수없이 많은 화가와 작품을 접했다. 그중 그의 눈길을 가장 사로잡은 것이 바로 금강산을 소재로 그린 작품들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화가들이 가장 많이 그린 것이 금강산이었어요.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 소정 변관식 등이 대표적이죠. 일제강점기에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이 열릴 때면 거의 대부분의 화가들이 금강산을 그려서 출품했습니다. 그런 작품들을 전시할 때마다 속된 말로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했죠. 가볼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 작가가 미술디렉터로 일하던 1970~80년대엔 국내에 화랑이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화랑, 현대화랑, 진화랑 등 제법 알려진 화랑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문화화랑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게 미술 분야에서 일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오르내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붕괴를 계기로 노태우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1992년 8월 한중 수교가 체결되고, 곧바로 한중 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기 시작했다. 이듬해 6월, 이 작가는 드디어 한민족의 영산이자 한반도의 주산인 백두산에 오르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지금도 백두산 천지에 오른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웅장하고 장엄한 풍광이란 정말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정말 압도된 느낌이었어요. 천지를 볼 땐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라고요.”

백두산에 다녀온 후 이 작가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다. 국내에 있는 그 어떤 산에 올라도 카메라 셔터가 잘 눌러지지 않았다. 아무리 명산이라고 해봤자 당연히 백두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문제는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백두산의 사계절은 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백두산 천지. (이정수 작가 제공)

막상 백두산에 다시 오르자니 이번엔 평소 별문제 없이 잘 사용하던 카메라가 걸렸다. 백두산을 담기에는 턱없이 시원찮고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결국 백두산 천지를 한 컷에 촬영할 수 있는 파노라마 기능을 장착한 독일제 카메라를 구입해 다시 백두산 촬영에 나섰고, 그렇게 백두산의 봄과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을 담기 시작했다. 또 그렇게 미술디렉터에서 백두산 전문 사진작가로의 길로 들어섰다.

남한 작가 최초 온정각 ‘금강산 사계’ 전시
다시 시간이 흐르고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소 떼를 이끌고 육로를 이용해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올라가고, 얼마 안 지나 북한이 남한 사람들에게 금강산 관광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11월 18일 오후 동해항에서 실향민과 관광객, 승무원 등 1400여 명을 실은 대형 유람선 ‘현대 금강호’가 북한 장전항으로 출항했다. 바로 그 역사적인 첫 항해에 이 작가가 빠질 리 없었다. 젊은 시절 미술디렉터를 하면서 작품으로만 수없이 봐온 바로 그 금강산 아닌가.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산세며, 투명하고 맑은 금강수가 계곡 담소에 담겨 비친 비취색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우리나라 어떤 산이나 계곡에서도 못 보던 색이었죠. 옛날부터 경치 좋은 명당자리에는 사찰이 들어가서 암자를 만든다고 하잖아요. 얼마나 아름다우면 ‘일만이천봉에 팔만구암자’라고 했을까요.”

한 폭의 그림 같은 금강산의 사계(四季). 망명대(봄). (이정수 작가 제공)

백두산과는 또 다른 매력에 빠진 이 작가는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광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셀 수 없을 만큼 금강호에 몸을 실었다. 마침 현대그룹 대북사업을 총괄했던 정몽헌 회장과의 인연으로 현대아산 측으로부터 여러 가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됐다.

금강산은 계절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 다르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 또는 설봉산이라고 한다. 산이 계절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기 때문에 달리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금강산의 사계절’을 3년간 오롯이 사진에 담은 이 작가는 2001년 11월 금강산 관광 3주년을 기념해 북한 장진항 온정리 온정각에서 개인사진전을 열었다. 남한 작가로는 최초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금강산의 사계(四季). 만물상(여름). (이정수 작가 제공)

“제 작품을 보고 북한 사람들이 ‘이 선생님은 요술을 부리네요’라고 하더라고요. 색채나 이런 걸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느냐고. 사실 당시 북한은 사진 인화나 현상 기술이 상당히 낙후돼 있었거든요.”

한 폭의 그림 같은 금강산의 사계(四季). 집선연봉(가을). (이정수 작가 제공)

전시회 이후 이 작가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시선과 대우가 확연히 달라졌다. 그동안 금강산 곳곳을 샅샅이 훑고 다니며 촬영하는 이 작가가 혹시 남측 정보기관 관계자가 아닌지, 뭔가 다른 속셈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전시회를 계기로 그런 의심의 눈초리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오히려 평양에서 온 금강산관광 총소장이 이 작가에게 “백두산도 이렇게 아름답게 사계절을 좀 찍어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이 작가는 욕심이 났다.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북한 5대 명산으로 꼽히는 묘향산과 칠보산, 구월산까지 모두 찍고 싶었다. 이 작가는 당시 비사() 한 토막을 털어놨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금강산의 사계(四季). 삼선암(겨울). (이정수 작가 제공)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게 인지상정”
“제가 그 금강산관광 총소장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고 했어요. 뭔지 말하라고 해서 북한 5대 명산을 다 찍고 싶다고 했죠. 그랬더니 흔쾌히 승낙하면서 한 3개월 정도면 찍을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죠. 나중에 알고 보니 최승철 부부장이라는 사람이 저를 굉장히 잘 보고 예우를 해준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최승철 전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은 김정일 정권 시절 북한의 대남정책을 총괄하던 실세였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어갈 때 영접을 나온 북한 측 대표이기도 했다. 그런 최 부부장이 승인한 것이라면 실현 가능성이 무척 높았던 셈이다.

이 작가는 2001년 11월 금강산 관광 3주년을 기념해 북한 장진항 온정리 온정각에서 남한 작가로는 최초로 개인사진전을 열었다. (이정수 작가 제공)

실제 당시 이 작가의 작품은 남북한 모두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정사업본부가 남북 정상회담을 기념해 2007년 10월 발행한 백두산 기념우표에는 이 작가의 작품 ‘천지’와 ‘리명수폭포’가 북한 사진작가 김용남의 작품 두 점과 함께 실렸고, 이듬해인 2008년에는 이 작가가 촬영한 금강산 사계 작품 4점으로 금강산 기념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지면서 이 작가의 바람도 이뤄지는 듯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관계가 급속도로 얼어붙고 말았다. 2008년 7월 11일 새벽,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 씨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금강산 관광이 전면 중단된 것. 이 작가는 일반인과는 달리 금강산 관광지구 사업자 신분으로 한동안 금강산을 오갈 수 있었지만 2012년 이후에는 그마저도 끊기고 말았다.

‘금강산인’. 금강산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북한 사람들이 붙여준 별칭이다. 1998년부터 2012년까지 14년 동안 금강산을 찾은 횟수가 어림잡아 100번이 넘는다. 백두산을 다녀온 것도 60번 이상. 헌법재판소와 통일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인천공항 등에 걸린 금강산과 백두산 사진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북한으로부터 약속받았던 나머지 세 곳의 명산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마지막 꿈이라는 이 작가가 바라는 통일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저는 우리가 전적으로 재정을 부담하는 통일이나 흡수통일 같은 건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풀고 도와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우리는 기술이 있고, 북한에는 싼 노동력이 있지 않습니까. 북한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으로 철로와 육로를 연결한다면 남북 모두 21세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 남북 간 신뢰가 회복돼서 아직 못가본 묘향산과 칠보산, 구월산까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