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82023.04.

화천군 비목공원에 놓인 나무 비석과 철모. 가곡 ‘비목’의 가사를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글 · 김건희 기자 사진 · 지호영 기자

걸어서 155마일


초연이 쓸고 간 ‘비목’의 고향

③ 강원도 화천

중부전선 철책을 보며 평화를 꿈꾸다

화천(華川)은 ‘물이 반짝반짝 빛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강원도 화천 지역에 이런 이름이 붙은 건 북한강 때문이다. 화천은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다. 그 덕에 넘쳐나는 물만큼이나 수많은 평화와 안보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그 사연을 듣고자 구불구불 산길을 달려간다.
‘고지전’의 무대, 화천 파로호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와 화천읍 동촌리에 걸쳐 있는 화천댐은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 국내 발전량의 40%를 생산하는 국가 중요 시설이었다. 6·25전쟁 당시 화천댐 수력발전소 발전량은 34만kw. 이 때문에 화천댐을 차지하고자 이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국군 6사단과 미군 17연대가 연합해 중공군 2만4000여 명을 격파해 대승을 거둔 ‘643고지 전투’의 무대가 바로 이곳이다. 당시 한미 연합군은 적군 생존병력 대부분을 포로로 붙잡아 6·25전쟁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다. 그래서 이 전투를 ‘파로호 대첩’이라고도 한다.

칠성전망대에 설치된 DMZ 조형물 위로 태극기와 유엔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파로호는 화천댐 인근에 있는 호수 이름. 원래는 화천호 등으로 불렸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55년 깨뜨릴 ‘파(破)’자와 오랑캐 ‘로(虜)’자를 써서 파로호(破虜湖)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중공군을 물리친 장소라는 의미다. 바로 이곳에 건설된 ‘파로호 안보전시관’에 가면 치열했던 6·25전쟁 당시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뒤이어 발길이 향한 곳은 칠성전망대 안내소다. 화천군 부촌리에서 상서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칠성전망대 안내소는 화천 지역 민간인통제선(민통선) 구실을 한다. 군 당국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이동이 불가능하다.

칠성전망대가 위치한 휴전선 중부전선(철원 김화~화천군) 일대가 제7보병사단(7사단) 관할이라, 안내소에서 7사단 소속 노현준 중사 일행과 이정옥 칠성전망대 해설사를 만났다. 이들과 함께 강원 민통선 검문소를 통과해 산길을 따라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를 내달린다. 들판 군데군데서 연둣빛 싹이 올라오는 게 눈에 띈다. 야생동물의 보고인 화천에선 봄이면 산양, 사슴, 고라니 떼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중동부 지역 대표적인 안보 관광지인 칠성전망대.

파로호 전투와 643고지 전투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파로호 안보전시관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또 떠올리는 건 전쟁의 기억이다. 칠성전망대 입구에는 ‘425고지 전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425고지 전투는 6·25전쟁 최후의 전투로 알려졌다. 때는 1953년 7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다. 휴전협정이 한창 진행 중이던 이때도 북한은 중요 전력자원인 화천발전소를 탈환하고자 안간힘을 썼고, 국군은 목숨을 걸고 이들과 맞서 싸웠다. 7월 20일부터 휴전 당일인 27일까지 8일에 걸쳐 국군 7사단과 중공군 135사단 사이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가 영화 ‘고지전’의 모티프가 됐다.

최후의 승자가 된 건 국군 7사단. 이 승리를 통해 우리가 화천발전소를 확보했고, 휴전선을 38선 북쪽으로 35km 밀어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전공을 세운 7사단은 평양에 가장 먼저 입성한 부대로도 유명하다. 이때 전사한 군국 장병을 애도하는 글이 기념비에 적혀 있다.

칠성전망대 인근은 가곡 ‘비목(碑木)’의 배경이기도 하다. ‘초연(硝煙·화약 연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작사가는 1960년대 중반, 화천군 백암산에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6·25전쟁 전사자를 기리는 ‘나무(木) 비석(碑)’을 본 기억을 되살려 ‘비목’의 가사를 썼다. 칠성전망대에 들어가면 이처럼 수많은 청년의 피로 기록된 6·25전쟁과 7사단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내부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비무장지대를 조망하는 것도 가능하다. 망원경에 눈을 가져다 대니 강원도 화천군, 인제군 등 동부전선의 험한 지형과 중부전선에 해당하는 철원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칠성전망대 왼쪽엔 불교를 상징하는 구조물이 걸려 있다. 북한 주민들에게 남한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설치했다고 한다. 그 너머로 강이 흐르고 북한 경계초소(Guard Post·GP)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곳에서 국군 GP와 북한군 GP 사이 거리는 겨우 830m. 맑은 날엔 강 너머 북한군 움직임을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이정옥 해설사는 칠성전망대에 대해 “전방 군부대에 있는 전망대 가운데 최북단에 위치해 있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실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칠성전망대 입구에 세워져 있는 425고지 전투 전적비. 425고지 전투는 6·25전쟁 최후의 전투로, 영화 ‘고지전’의 모티프가 됐다.
최전방에서 조국 지킨 전쟁 고아
전망대를 빠져나와 화천읍으로 이동했다. 화천읍에는 인근 부대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정착한 군인 출신이 많다. 노수태 무공수훈자회 화천군지회장도 그중 한 명이다. 숯처럼 진한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 건장한 체구 등 전형적인 군인 이미지를 가진 그는 육군 15사단 출신이다. 노 회장의 아버지는 6·25전쟁 장항전투 참전 용사로 전투 중 목숨을 잃었다. 노 회장은 6·25전쟁 중 어머니도 잃은 전쟁 고아다.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겨져 굶주림을 겪을 만큼 힘겹게 자란 그는 개인적 아픔을 극복하고자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경기도 연천군 최전방 지역에서 군생활을 시작한 노 회장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해 상이 6급으로 무공수훈장을 받았다. 이후 2001년 강원도 화천의 15사단 주임원사로 만기 전역한 뒤 고향인 충남 청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았다.

무공수훈자회는 국가수호유공자 단체로, 노 회장은 2021년 화천군지회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충애(忠愛)’ 두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미래 통일 주역이 될 화천군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노수태 무공수훈자회 화천군지회장. 15사단 출신으로, 6·25전쟁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

“무공수훈자회 화천군지회는 조국에 목숨을 바친 선열의 얼을 받들며 호국안보 의식을 드높이고자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6·25전쟁을 겪지 않은 전후세대가 한반도 현실을 바로 알아야 제대로 된 통일과 안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탐방하고 전쟁 세대와의 대화를 통해 6·25전쟁의 교훈을 깨닫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노 회장은 최근 이어지고 있는 북한의 도발 위협에 대한 우려도 밝혔다.

“현재 북한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고와 제재에 정면 도전하면서, 핵과 미사일 고도화에 몰두하고 있어요. 도발 의지도 점차 노골화하고 있고요. 이처럼 엄중한 안보 상황에서 우리 국민은 굳건한 안보의식을 바탕으로 지혜와 역량을 한데 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국제사회와 함께 대북 압박과 제재를 한층 더 강화해나간다면 북한이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 회장의 비장한 얼굴 위로 해가 저물고, 하늘 가득 주황빛 구름이 퍼져간다. 들녘에 푸르게 올라오는 새싹 빛이 연하고 곱다. 이 싱그럽고 고운 산천에 드리워진 전쟁 위협은 언제쯤 사라지게 될까. 문득 낮에 본 중부전선 철책의 탄탄하고 빈틈없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 언저리에서 수많은 청년이 후손에게 더 나은 조국을 물려주고자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오직 참새 떼만 철조망 넘어 남과 북을 오간다. 그들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함께 둘러보면 좋은 화천 여행지


비목공원
6·25전쟁 당시 희생된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자 가곡 ‘비목’의 탄생지다. 비목 작사가인 한명희는 1960년대 중반 백암산 계곡 DMZ에서 군 생활을 했다. 당시 우연히 잡초 우거진 곳에서 이름 모를 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했고, 그 무덤 주인이 전쟁 당시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으리라 생각하며 ‘비목’의 노랫말을 지었다. 이후 작곡가 장일남이 이 노랫말에 곡을 붙여 가곡 ‘비목’이 탄생했다.
세계 평화의 종 공원
2009년 5월 화천 평화의 댐 인근에 개소한 공원이다. 공원 안에는 높이 5m, 너비 3m에 달하는 ‘세계 평화의 종’이 있다. 이 종은 세계 60여 개국에 있는 분쟁지역에서 수거한 총알과 포탄의 탄피 37.5톤을 녹여 주조한 것이다. 세계 평화의 종 공원에는 이 외에도 노벨 평화의 종, 노벨 평화상 수상자 12명의 평화 메시지와 핸드프린팅 등이 전시돼 있다. 공원 개장식 땐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평화의 댐
북한강 최북단 민통선 경계에 있는 댐이다. 1986년 전두환 정권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덮고자 “북한이 서울올림픽을 방해하려고 금강산댐을 건설해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 한다”고 과장 발표했다. 이를 막기 위해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북한강 길목에 평화의 댐을 건설하기 시작해 1989년 준공했다. 건설 당시엔 ‘분단의 상징’이었으나, 지금은 물의 고장 화천을 대표하는 안보 여행지이자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