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82023.04.

통일부가 메타버스 플랫폼을 이용해 구축한 ‘DMZ 유니버스’ 메인 화면

평화통일 현장


DMZ 옛 마을로의 시간 여행

6·25전쟁 이후 사라진 공간, 가상세계에 생생히 구현

‘1940년대 마을 체험!’
온라인 커뮤니티를 이용하다 우연히 발견한 게시물 제목이다. 알고 보니 통일부가 지난해 12월 개발한 ‘메타버스 DMZ 사라진 마을’ 얘기였다. 통일부는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존재했던 비무장지대(DMZ) 내 마을 400여 개 가운데 △연천군 고랑포리·항동리 △철원군 외촌리·유정리 △양구군 문등리 △고성군 대강리·사비리 등을 메타버스에 구현했다. 그 이름이 ‘사라진 마을’이다. 이 프로그램에 접속하면 3차원(3D) 아바타를 이용해 옛 마을을 둘러보고 15개 미션과 게임을 하며 당시 지역 문화와 주민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니, 호기심이 동했다. ‘메타버스 DMZ 사라진 마을’은 정부가 처음으로 추진한 DMZ 국가기록사업이다.
옛 마을 거주자 구술 받아 원형 복원
메타버스는 ‘가상’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 ‘메타(meta)’와 ‘현실세계’라는 뜻을 가진 영어 ‘유니버스(universe)’를 합쳐 만든 말로, 현실 세계처럼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가상세계를 의미한다.

통일부는 오래전 사라진 DMZ 마을을 어떻게 메타버스에 복원했을까. 그 첫걸음은 자료조사와 생존 주민 증언 수집이었다. 통일부는 강원대 ‘DMZ HELP 센터’에 의뢰해 DMZ 내 마을 위치와 특성을 찾아나갔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에 제작한 지도와 지적도, 당시 신문기사를 분석하고 정전협정 당시 지도와 현재 위성사진과 비교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김창환 강원대 DMZ HELP 센터장(지리교육과 교수)은 “DMZ에는 지금도 옛 마을 흔적이 남아 있다. 그 모습을 제대로 알고자 해당 지역에 살았던 생존 주민 24명을 상대로 기억에 남은 풍경과 고향에서의 추억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또 철원군 중세리처럼 규모가 큰 마을의 경우, 유엔군사령부와 국방부 협조를 얻어 생존 주민들과 함께 방문하는 등 현장 조사도 진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옛 마을 거리 모습과 가옥 배치 등을 도면에 그렸다. 이후 3D 작업을 거쳐 예전 마을을 고스란히 메타버스에 구현했다. 관련 자료를 담은 책자와 사진, 동영상은 ‘DMZ 유니버스(universe.go.kr)’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DMZ 유니버스’는 통일부가 정부 부처 가운데 최초로 메타버스 플랫폼을 활용해 구축한 DMZ 정보 제공 서비스로, 별도 애플리케이션 설치 없이 바로 접속할 수 있다.

그럼 가상세계 속 1940년대 DMZ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이 공간을 체험하려면 ‘DMZ 유니버스’에 접속해 아바타를 만들어야 한다. 생활한복을 입은 아바타가 처음 도착하는 곳은 섬마을. 이곳은 DMZ 관련 데이터를 한데 모아둔 가상의 평화섬 콘셉트 공간이다. 입장하면 거대한 테마파크 형태 공간이 △사라진 마을 △DMZ 가상체험 △DMZ 실태조사 △행사 안내 △자료실 등 모두 다섯 개 등장한다. 놀이동산 입구에 있을 법한 안내도가 있어 한눈에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DMZ 유니버스’라는 이름이 제법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사라진 DMZ 마을로 여행을 떠날 시간. 비행기 모양 열기구를 클릭하자 매표소에서 근무하는 직원 아바타들이 보인다. 매표소 매대에는 연천, 철원, 고성, 양구 등 우리가 가볼 지역명이 적혀 있다. 먼저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옛 마을에 들어가는 대기 라인에 섰다. 마을로 이동하는 동안 화면에 해당 마을에 관한 안내문이 뜬다.

‘DMZ 유니버스’에서 이용할 수 있는 메타버스 ‘사라진 마을’ 첫 화면.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옛 마을 거리 모습.

‘사라진 마을’에 접속하면 옛 마을 5개 공간에서 15개 미션과 게임을하며 당시 지역 문화와 주민 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기자의 아바타가 고랑포리 삼거리에 들어서자 임진강 건너편에 조성된 초가집 사이로 당시 신문물의 상징이던 화신백화점 분점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구성한 공간이다. ‘DMZ 사라진 마을’ 제작 당시 구술 채록 작업에 참여한 1934년생 조성제 어르신은 6·25전쟁 발발 전까지 고랑포리에 거주했고, 고랑포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구술 내용은 이렇다.
그 시절 ‘핫플’ 화신백화점을 만나다
“나루터에서 올라오면 화신백화점 건물이 보였다. 화신백화점에는 극장 이름이 한자로 쓰여진 간판이 붙어 있었다. 백화점 건물 크기는 학교보다 작았다. 학교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두 반씩 있었다.”

이 구술을 토대로 가상의 화신백화점 외벽에는 한자 간판을 걸었다. 고랑포리에 있는 고랑포구는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고, 물류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나루터를 중심으로 커다란 동시(東市·시장)가 형성돼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화신백화점은 일제강점기 민족 자본으로 세운 화신상회 후신으로, 1931년 박흥식이 매수해 백화점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메타버스 DMZ 사라진 마을’ 고랑포리 코너에는 미션 체험 공간도 마련돼 있다. 백화점 직원 가까이로 다가가니 아바타 얼굴 위에 ‘백화점의 사라진 보따리 찾아오기’ 미션 안내문이 뜬다. 금색 보따리를 찾고 보상으로 점수를 획득했다.

아바타가 두 번째로 이동한 공간은 강원도 양구군 문등리 옛 마을. 광산과 인삼으로 유명한 문등리를 메타버스에 옮겨놓았다. 이 지역 구술자로 참여한 정일호 어르신은 1931년 문등리에서 태어났다. 19세 되던 해 뜻하지 않게 인민군에 차출됐다가 곧바로 포로가 돼 거제도 수용소에 가게 됐고, 어렵게 그곳에서 나온 뒤엔 국군에 입대해 나중에는 미군부대에서도 근무했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문등리 옛 마을 풍경은 다음과 같다.

“수입천 주변으로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던 형석 광산 마을이 있었다. 광산 골짜구니에 굴이 참 많았다. 광산 회사도 있었다.”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구의 옛 모습을 재현한 고랑포구역사공원 내부.(한국관광공사 제공)
1929년 문등리 일대에 광산 채굴을 목적으로 문등광업주식회사가 설립되며 마을 규모가 커졌다. 문등광업주식회사는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일제의 군수물자 보급 기지로도 활용됐다. 가상 문등리 마을에서는 문등광업주식회사를 비롯해 광부 사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잃어버린 형석 광석 찾아오기’ 미션에 참여했다.

이어서 발길이 닿은 곳은 강원도 철원군 관전리 옛 마을이다. 1940년대 ‘핫플’ 철원극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어 눈길이 갔다. 돌출된 붉은 벽돌로 쌓은 극장 외벽과 아치형 창틀, 손 그림 간판 등이 옛 영화관 정취를 느끼게 한다. 마치 근대사 박물관에 들어선 듯 소소한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철원극장 간판에는 ‘디엠쥐 메-타버스’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데, 나무판 위에 붓으로 쓴 듯한 빨간 글씨가 감성을 자극했다. 글자마다 노란색 그림자 처리를 한 것도 특징이다. 서체의 삐침이나 꼬리 모양 하나도 사료에서나 보던 옛 간판 모양 그대로라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관전리 옛 마을에서 참여한 미션은 ‘황을수 선수의 권투 글러브 찾기’다. 황을수 선수는 일제강점기 ‘핵주먹’을 자랑하며 조선의 아들로 불렸던 권투 선수. 철원에서 태어나 철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잠시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인물이다. 1929년 동경 유학생 무도회 소속으로 명치신궁선수권, 관동학생선수권, 전일본학생선수권, 전일본아마추어선수권 등 네 개 대회를 석권하며 명성을 쌓았다. 가상 세계에서나마 황을수 선수의 아바타를 만나자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거림이 느껴졌다. 그에게 미션으로 찾은 권투 글러브를 건네고 보상을 받았다.

‘올림픽 권투선수 황을수 군 환영회’ 개최 소식(왼쪽 맨 위) 등 황을수 선수에 대한 기사를 실은 1930년대 동아일보 지면. 권투 실력으로 세계를 호령한 황을수 선수는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준 권투 선수다. ‘메타버스 DMZ 사라진 마을’에서는 ‘황을수 선수의 권투 글러브 찾기’ 미션에 참여할 수 있다.

이제 강원도 철원군 사요리 옛 마을로 이동할 차례. 철원역과 사요리역을 중심으로 우시장, 농산물 검사소, 얼음창고, 금강산 철도주식회사, 철원 여관, 철원 공립보통학교, 대장간, 철원 약국, 철도 사택 등이 모여 있다. 인구 이동과 물자 교류가 활발했다는 옛 사요리의 명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강원도 고성군 대강리는 농사짓기 좋은 기후 여건을 지닌 옛 마을이다. 금강산과 동해를 끼고 있어 천혜의 자연을 자랑하는 살기 좋은 어촌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상세계 속 생선가게 주인이 문어와 생선을 말리는 모습도 보였다. 이 마을에서 만난 주민 아바타는 “우리 마을에서는 봄, 여름, 가을에 낚싯대를 이용해 문어를 잡는다”고 소개했다.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바다를 둘러보다 초구역으로 걸음을 옮긴다. 초구역은 동해북부선 철도역으로, 강원도 고성군 고성읍 명호리에 있다. 파주 장단역처럼 민간인출입통제선 이북 비무장지대에 있다. 고성역과 8.5km, 제진역과는 6.0km 떨어진 곳이다. 한창 초구역을 구경하는데 동해북부선 열차 한 대가 빠르게 터널을 향해 달려간다. 1950년대 대강리를 관통하는 철도를 보다니, 신기한 기분이다.

이제는 갈 수 없게 된 DMZ 옛 마을을 가상세계에서 체험한 이들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박세겸(16) 군은 “DMZ 안에 마을이 존재한다는 건 그 시대 사람이 모여 살고 교류가 활발했다는 의미 아니냐”라며 “향후 한반도가 통일되면 이곳이 남북의 연결 통로 구실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