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82023.04.

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사람 중심 통일’ 꿈꾸는 북한 연구자 감희

“북한 사람 안 ‘민주주의 씨앗’,
싹 틔우면 통일 앞당겨질 것”

감희(가명) 씨는 연세대 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객원교수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21년 북한 사람의 내면을 신경생리학적으로 분석한 저서 ‘북한 사람 이해하기’를 펴냈고, 지금은 ‘북한녀자로 살기’(가제)라는 후속 저서를 집필하고 있다. 북한 연구자로서 감 씨의 꿈은 “북한 사람 안 ‘민주주의 씨앗’을 싹 틔워 그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게 함으로써 통일을 앞당기는 것”. 그는 “이건 학자로서뿐 아니라 개인으로서도 간절한 바람”이라고 했다. “그것이 북에 있는 가족을 하루라도 빨리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출신 성분 탓에 고통스럽던 북한 생활,
자유 갈망하며 탈북
감 씨가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것도 북에 남은 가족에게 혹시라도 피해를 끼칠까 우려해서다. 그는 “비공개로 활동하는 게 학자로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경력을 쌓는 데 다소 방해가 되긴 한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어느새 20년을 바라보지만, 가족은 여전히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탈북 여성의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로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북한 연구자 감희 씨.
북한에 남은 감희 씨 가족들을 고려해 실명과 얼굴은 공개하지 않는다.

감 씨는 북한에서 나고 자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도 했다. 얼핏 순탄한 길을 걸은 듯 보이나 살아가는 굽이굽이 굴곡이 적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지주였던 게 문제였다. 북한에서 출신 성분은 평생 사람을 따라 다닌다. 학창 시절 내내 1~2등을 놓치지 않았던 ‘수재’ 감 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대학에 갈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낙심했다. 똑똑한 딸에 대한 기대가 컸던 감 씨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감 씨는 “우리 아버지는 ‘지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평생 힘들게 사셨다. 맏딸인 내가 공부를 제법 하니 ‘우리 딸 인생은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런데 나 또한 집안 문제로 앞길이 막히는 게 보이니 무척 안타까워하셨다”고 했다.

부녀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장군님께 편지를 써보자’고 마음을 모았다. 감 씨는 당시 썼던 편지 내용을 줄줄 외웠다.

“학생은 공부를 잘하는 게 곧 아버지께 충성하는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저는 아버지 원수님께 충성을 다하고자 열심히 노력했고 모든 기간 최우등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말씀을 받들지 않는 일꾼들에 의해 대학에 가지 못하게 됐습니다. 제가 더 공부해서 아버지 원수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 편지를 봉투에 넣고 겉면에 ‘김정일 장군님께 드림’이라고 써서 부쳤다. 감 씨는 그때 생각이 떠오르는지 빙긋 웃으며 “나 때문에 우리 지역 당 관계자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라고 했다.

“그 편지가 평양에 닿지는 못했을 거다. 하지만 도당 교육부 검열 덕분에 ‘얘가 대학 가는 건 허락해주자’ 정도로 의견이 정리된 것 같다.”

감 씨 짐작이다. 이후 감 씨는 지역 단과대학 입학을 허가받았지만, 원하던 생명공학을 공부할 수는 없었다. “당이 ‘전기기계를 배우라’고 정해줬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는 것이다. 학업을 마친 뒤엔 지역 내 이름 있는 기업에 취직했다. 그런데 거기서 또 한 번 출신 성분의 벽에 부딪혔다. 감 씨 집안 내력을 알게 된 간부가 그것을 약점으로 잡아 집요하게 감 씨를 괴롭혔다. “네가 이 회사에서 살아남으려면 나한테 협조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성적 요구까지 일삼았다. 감 씨는 “요즘 말로 하면 ‘위력에 의한 성추행’을 당한 것”이라며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고 털어놓았다. 감 씨가 ‘탈출’을 생각한 건 그 무렵부터다.

“남과 북의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때 북한 사람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진정한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북한 사람’ 알리는 연구자 되고 싶다”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 모습도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감 씨는 “1980년대 북한은 남쪽을 비방하려고 대학생들 시위 모습을 자주 보여주곤 했다. 그 뉴스에 담긴 공식 메시지는 ‘봐라, 남한 사람들은 정부에 반대한다’였지만, 나는 그 이면에 있는 사람들 모습이 보였다”고 했다.

“시위대 얼굴이 하나같이 해사하고, 통통하게 살이 올랐더라. 좋은 옷을 입은 대학생들 뒤로 높은 건물이 줄지어 서 있고, 도로에는 차가 가득했다.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이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남쪽은 우리와 다르게 살고 있구나’ 생각할 즈음, 임수경이 비행기를 타고 북한에 왔다. 그의 외모와 옷차림, 미국과 한국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모습을 보며 자유에 대한 갈망이 생겼다.”

감 씨는 마침내 가족에게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선언했다. 출신 성분의 굴레를 벗어던진 채 마음껏 공부하고, 좋은 사람도 만나보고 싶다고 하자 가족들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감 씨는 “내가 북한에서 결혼할 경우, 나 같은 사람밖에 못 만날 게 뻔했다. 출신 성분 나쁜 부모 아래 태어난 내 자식은 또 어떤 삶을 살겠나. 그게 싫어서 나는 평생 아무도 안 만나고 결혼도 안 하겠다고 한 터였다. 가족들이 걱정하던 참에 ‘남쪽 가서 결혼하겠다’고 하니 차마 반대를 못 한 것”이라고 했다.

그가 고향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딸 결혼 비용으로 아껴뒀던 돈을 달러로 바꿔 감 씨 손에 쥐어줬다. 그러고도 차마 마지막 인사는 하기 힘들었던지, 감 씨가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문 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리며 돌아눕던 모습이 감 씨가 가진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이후 그는 한국에 오기까지 많은 일을 겪었다. 중국에서 붙들려 북으로 강제 송환됐다가 다시 탈출하기도 했다. 간신히 들어온 한국에서 감씨는 공부에 매달렸다. 신학, 심리학, 상담학, 신경생리학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책을 읽고 동료들과 토론을 거듭했다. 감 씨는 “처음에는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북한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었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많은 나라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궁금해하지만 ‘북한 사람’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게 감 씨 생각이다. 그는 “아무리 가혹한 독재 정권 아래서도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그 소식이 실시간 세계 각지로 전파되는데 북한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벌어지지 않으니, 외부 학자들은 북한이 보여주는 모습만으로 북한을 이해한다. 북한 사람은 모두 주체사상에 세뇌돼 있고 김일성 일가를 향한 충성이 몸에 배 있을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북한이 쉽게 변화하지도, 김 씨 정권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다. 내 의견은 다르다”고 했다.

감 씨에 따르면, 북한에 살면서 자유를 꿈꿨던 자신처럼 북한 사람 상당수가 ‘새로운 삶’을 원한다. 북한 밖에 훨씬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 또한 이미 많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체제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뼛속 깊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감 씨는 “정치범 수용소와 공개 처형 등으로 상징되는 북한의 폭력적인 정치체제는 북한 사람 삶을 전반적으로 옭아맬 뿐 아니라 신경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분석한다. 그 영향으로 북한 사람들은 작은 자극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 있고, 말 그대로 ‘얼어붙고’ 만다는 것이다.

북한 사람의 내면 세계를 신경생리학적으로 분석한 감희 씨 저서 ‘북한 사람 이해하기’.

감 씨의 책 ‘북한사람 이해하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대다수 탈북민은 중국에서 사람들이 최고 존엄의 이름을 존칭 없이 부르는 것을 듣고 불안에 몸이 떨렸다고 말한다.” 감 씨는 이것이 공포에 짓눌려 자율신경계에 생리학적 변화가 나타난 북한 사람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조금씩 변화는 시작되고 있다. 예를 들어 북한 사람들은 ‘낮에는 사회주의, 밤에는 자본주의’라고 할 만큼 이미 이중생활에 익숙하다. 그것이 조금씩 기존 체제를 좀먹고 있다. 감 씨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는 것, 불평불만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 원하는 장소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것이 곧 인권이고 민주주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자신들이 북한 변화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믿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게 감 씨의 바람이다. 그는 “저술과 강의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북한 사람’에 대해 알리고 통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