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32022.11.

UN 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9월 21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갖고 상호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대통령실

분석

한일관계 진단과 과제

1.5트랙 전략협의로
강제징용문제 해법 찾아야

강제징용문제 등으로 위기에 빠진 한일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과제를 제안한다.

지난 9월 21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은 한일 양국이 대화의 물꼬를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강제징용문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한일정상회담에 동의한 것은 일본도 적극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 한일정상회담으로 한일관계의 해빙기는 시작됐다. 9월 27일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한국 정부 조문 사절단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국장(國葬)에 참석해 기시다 총리와 회담을 한 것도 그 예이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일본의 냉담함이 가십거리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한일관계 변수는 일본의 정국 동향
윤석열 정부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어느 정권보다 한일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매우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정상회담조차 강제징용문제를 둘러싼 샅바싸움으로 보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한국 대통령실이 미국 뉴욕 유엔총회 기간 중 한일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다고 발표하자 일본 정부가 ‘사실무근’이라고 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번 논란을 두고 한국 정부만 탓하는 입장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볼 수 없다. 그 배경에는 일본 정부의 태도도 한몫했다. 기시다(岸田) 정권은 강제징용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한일정상회담을 추진할 경우 직면하는 자국 내 비판의 대응에만 노심초사했다. 그러나 기시다 총리는 지지율이 떨어지는 어려운 정치상황에도 한일정상회담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는 국내외 정치 환경 변화에 따라 한일 정상들의 한일관계 개선 의지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선 정해진 임기도 영향을 준다. 한국 대통령은 5년 임기가 보장된 반면 일본 총리는 정국 동향에 따라 임기가 불투명하다. 그리고 국내외 환경에 따라 정책 우선순위도 변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윤 대통령보다 기시다 총리의 동향이 한일관계에서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대승을 이끌었던 기시다 총리는 불과 2개월 만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걷게 됐다. 9월 27일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국장과 구 통일교 문제가 겹쳐 지지율 회복이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헌정 사상 최장 재임 기간과 외교상의 실적 등의 이유로 국장을 해야 한다고 정당성을 설명했지만 찬성보다 반대가 상회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몇 개월 전 여론조사를 보면 기시다 내각을 지지하는 이유로 ‘총리의 인품을 신뢰할 수 있다’가 가장 많은 답변을 차지했다. ‘인품’이라는 것은 총리에 대한 신뢰이다. 이를 통해 기시다 총리가 아베 전 총리와 스가 전 총리처럼 ‘밀어붙이는 성격’이 아니라 ‘조정형: 듣는 귀를 가진 성격’으로 일본 국민에게 안정감을 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기시다 총리의 장점은 사라지고 우유부단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 하락이 멈추지 않는 데 있다. 그 이유는 아베 전 총리와는 달리 단단한 지지층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민당 내 지지도 굳건하지 않아 지지율 하락을 멈출 카드도 없다. 이후 정국의 동향이 주목되는 상황이다.

최근 기시다 총리의 어려운 정치상황을 고려하면 한일정상회담은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한국의 상황도 일본 못지않게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피해자 단체들의 대일강경 목소리는 더욱더 높아지고 있다. 자칫 일본에만 면죄부를 준다는 식의 프레임에 걸려 지지율이 더 떨어지는 상황도 나타날 수 있다. 벌써부터 이번 한일정상회담을 두고 대일 구걸외교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한일정상회담을 진행했다는 점은 한일 정상들의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강제징용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민관이 함께 논의하는 1.5트랙 전략협의를 확대해 한일관계 개선의 목소리를 확산시켜가는 것이 필요하다.
사진은 지난 8월 3일 외교부 앞에서 기자회견하는 민관협의회 피해자 지원자 및 대리인단 ©연합
피해자에 대한 관심과 한일 양국 간 이해로 강제징용문제 해법 찾아야
윤석열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선행해야 할 일은 강제징용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와의 교섭에서 성과를 거두고 이를 바탕으로 피해자들을 설득하는 일이다. 윤석열 정부는 과거사문제(강제징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방적이고 투명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국민과 소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민관협의회의 논의를 통해 피해자들과 일본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를 찾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민관협의회 논의는 대략적으로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금화 조치를 방지하기 위한 법적인 논의로서는 병존적 채무인수 방식이 주요한 의제로 등장했다. 병존적 채무인수란 종래의 채무자의 채무를 면제시키지 않고 제3자(인수인)가 동일한 채무를 부담하는 계약이다. 병존적 채무 인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채무자(미쓰비시중공업)와의 약정을 통해 제3자가 채무를 인수해야 한다. 둘째, 정부의 예산이 아닌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이익을 본 기업과 일본기업의 자발적인 기부를 통해 피해자들을 배상한다. 셋째, 새로운 재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는 행안부 산하의 강제동원 피해자 재단이 배상을 시행한다. 넷째, 피고기업도 재단에 돈을 기부해 민간 화해에 동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섯째, 피해자가 원하는 일본기업의 사죄 표명도 고려해야 한다. 일본의 사죄와 반성은 광범위한 의미를 지니고 이에 대한 실현 방법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이러한 민관협의회의 논의가 피해자들의 이해와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현실적 방안을 도출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강제징용문제는 앞으로도 피해자들의 원칙론적 입장과 현실적인 대안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강제징용문제는 갈등을 관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선 한일 정부는 2015년 위안부 합의의 교훈을 되새겨봐야 한다. 당시 한일 양국 정부는 합의 이후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감성적인 조치에 무감해 국민적 반감을 샀다. 앞으로 강제징용문제의 현금화 조치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모색하든 국민적 비판과 논란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도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정부의 노력은 계속돼야 한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피해자들과 만나 이해를 구하는 노력이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정부는 지속적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비판적인 논의를 수용하는 겸허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윤 대통령이 주장하는 포괄적 해결방식은 일괄 타결방식이 아니라 한일 양국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해소될 수 있다. 앞으로 한일 양국은 강제징용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이 오해할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하고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한일 양국의 갈등은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워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제징용문제에서도 법적, 정치적인 입장만 앞세우면 타협점은 생겨날 수 없다. 지난 8월 한일포럼에서 오카다 대사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관점에서 되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강제징용문제의 해법도 민간 화해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 일본이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강제징용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사진은 박진 외교부 장관이 9월 2일 미쓰비시중공업 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자인 양금덕 할머니 집을 방문해 이야기를 듣는 모습 ©연합
다차원적 로드맵 마련해 소통 채널 확대
무엇보다도 한일 양국의 관계 개선을 위한 전략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우선 한국 정부는 강제징용문제의 해법에 대한 로드맵을 만들어 차근차근 일본과 소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한 번에 일괄타결로 끝낼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서로의 신뢰가 쌓이게 되면 대한수출규제조치 등은 해결될 수 있다. 강제징용문제의 해법을 위해 국내 피해자, 국내 여론,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다차원적 로드맵이 필요하다. 이번 외교장관회의를 통해 강제징용문제에 대한 민관협의회의 논의과정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부터는 강제징용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교섭이 진행돼야 한다. 일본도 이에 맞춰 한국의 마음을 사는 조치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일 양국 정부는 정기적인 협의체를 제도화해야 한다. 국장급 협의, 한일외교장관회의, 한일정상회담을 정례화해 원활하게 소통해야 한다. 앞으로 G20 회의에서 한일 정상이 만날 때는 강제징용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교섭이 진행되어야 한다.

또한 한일 양국은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소통 채널을 확대해야 한다. 이번 정상회담은 한일관계 개선이 정상들의 의지만으로는 진전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정치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양국관계 개선은 쉽지 않다. 따라서 한일 양국은 민관이 함께 논의하는 1.5트랙의 전략협의를 활성화시킬 필요가 있다. 미중 전략경쟁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동북아 질서의 불투명성은 한일 협력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트랙 전략협의를 확대해 한일관계 개선의 목소리를 확산시켜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더불어 여론의 동향이 긍정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지금 한일관계를 개선하지 못한다면 양국의 미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한일 양국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국제관계의 파워 밸런스가 변화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한일관계는 새로운 조정기에 있다. 한일 양국이 각자의 길을 가면서 상대방과의 협력이 필요 없다는 극단론은 서로의 미래를 해치는 길이다. 강제징용문제를 관리하면서 한일 양국이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진 창 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