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32022.11.

윤석열 대통령이 9월 20일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

특집

유엔총회 기조연설과 한국의 역할

지구적 도전 대응하며
글로벌 거버넌스 강화

윤석열 대통령은 제77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의 유엔 중심 연대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 기조연설의 특징을 살펴보고 글로벌 복합위기 극복을 위한 한국의 역할을 제안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9월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열린 제77차 유엔총회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했다. 취임 4개월 만에 이루어진 윤 대통령의 첫 번째 유엔총회 참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제사회 데뷔전이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했다고 평가된다. 외교 일선에서 유엔 업무를 많이 다루던 필자는 5년 단임제의 대한민국 대통령은 취임 첫해에 반드시 유엔총회에 참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매년 9월 열리는 총회에는 193개 회원국 중 140명 내외의 국가원수가 참석하는데 국제사회에 그 이상의 정상급 다자외교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를 활용해 가급적 많은 정상들과 첫인사를 나누는 것이 5년 간의 대통령 임무 수행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국제사회 연대와 자유 강조하며 글로벌 이슈에 초점
유엔총회의 꽃은 회기 시작 후 1주일간 각국 정상이 행하는 15분 정도의 기조연설이다. 정상들은 자기 나라의 외교 기조와 중요한 국가 정책을 짧은 연설에 집약시켜 발표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기조연설 시작일인 9월 20일 ‘자유와 연대: 전환기 해법의 모색(Freedom and Solidarity: Answers to the Watershed Moment)’이라는 제목으로 기조연설을 했다. 연설 내용을 분석해 보면 세 가지 정도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과거 유엔 연설이 우리나라의 직접적인 관심사 중심이었던 데 반해 이번 연설에서는 글로벌 이슈중심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사실 이런 변화는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났다. 1991년 우리나라가 유엔에 가입한 이후 약 10년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은 한반도 문제 등 우리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2000년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개최 등으로 국제적 역할이 확대되고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면서 점차 국제사회의 공통적 이슈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선진국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관심사와 세계의 관심사 간 일치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의 이번 기조연설은 북한이나 한반도 문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추세에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한반도 관련 사항과 글로벌 이슈 간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에는 남북관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에서까지 북한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고려도 반영된 듯하다. 유엔에서 북한 문제를 거론하려면 북핵, 북한 인권 등 유엔 의제로 다루어지는 이슈들을 피해가기 어렵고 북한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 국제사회의 연대 필요성과 세계시민의 기여를 강조하는 내용이 두드러진다. 이번 유엔총회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3년 만에 제대로 열리는 총회이지만 불행히도 우크라이나 사태의 먹구름에 덮여 있었다. 코로나19 대유행에서 우크라이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2년 반 동안 이어진 세계적 위기 상황은 국제문제 전문가나 일반인 모두에게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의 역할에 대해 회의를 갖게 했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는 국제사회의 단합과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위기 상황에서 각국이 각자도생의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 시민들은 세계정부가 부재한 상황에서도 국제기구와 협약들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글로벌 거버넌스가 제공되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국제적 거버넌스 체제의 취약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지난 2015년 9월 열린 제70차 UN총회에서 세계 각국은 2030년까지 17개의 인류 공동 목표인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달성하기로 결의했다.
사진은 2015년 9월 22일 뉴욕 유엔본부 건물에 17개 목표의 아이콘을 띄워놓은 모습 ⓒUN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유엔 기조연설을 통해 국가 간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 인류와 지구를 생각하는 세계시민 의식을 강조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글로벌 거버넌스의 실패는 특히 한국처럼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가에 더 큰 타격을 준다. 세계 26위의 인구와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한국으로서는 유엔의 글로벌 거버넌스가 강화돼 각종 지구적 도전에 더욱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국제적 연대와 세계시민 의식을 전 세계 국가들에게 호소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선도적 역할을 할 것임을 선언하는 것은 우리 국익에 부합하는 동시에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셋째, 기조연설 전체에 ‘자유’의 개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인권(human rights)’ 또는 ‘인간안보(human security)’에 해당되는 부분에 ‘자유(freedom)’의 개념을 넣어 이를 강조했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좁게는 인권의 두 가지 구성 요소, 즉 자유권과 사회권 중 자유권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이후 서구국가들은 자유권을, 사회주의국가들은 사회권을 중시해왔다. 1966년에 만들어진 국제인권규약 또한 자유권 규약과 사회권 규약 등 두개의 기둥으로 나뉘어 채택됐다. 이러한 측면에서 윤석열 정부는 자유권 쪽에 더 큰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 크게 본다면 윤 대통령의 기조연설은 ‘자유’라는 개념을 인권 차원을 넘어 ‘생존’이나 ‘안보’의 대체어로 사용하고 있다. “국가의 자유가 위협받을 때”, “질병과 기아로부터의 자유” 등의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부분들은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의 정치 철학에 바탕을 둔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인간개발지수(HDI)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 교수가 주장한 ‘자유로서의 개발(development as freedom)’처럼 자유의 개념을 넓게 본 것이다. 개발을 통해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 개인의 삶에 선택지가 넓어지므로 자유가 신장된다고 할 수 있고 국가 안보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정부의 선택지가 제한되므로 결국 자유가 침해된다는 뜻이다.
지구적 과제 극복 위한 국제사회 노력에 앞장서야
글로벌 이슈에 초점을 맞춘 윤 대통령의 기조연설은 전환기에 처한 국제사회의 관점에서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국제사회는 과거에도 큰 전쟁이나 대유행병 같은 재난이 발생한 이후 국제협력을 강화하고 인류의 미래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여 왔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주의가 태어났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엔이 창설돼 집단안보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게 된 것이 좋은 예다. 위기 상황에서 부각되는 ‘국가중심주의’는 국가 간의 충돌을 가져오고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할 수 있음을 비싼 값을 치루고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집단적 성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의 세계적 위기가 국제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과도한 국가중심주의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갈등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 민주주의 세력과 중국, 러시아 등 전체주의 세력 간의 대립 양상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이 그 예다. 이러한 대립은 앞으로 국제관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한국의 외교정책은 전쟁, 테러, 기후위기, 난민문제 등 지구적 도전을 극복하고 글로벌 거버넌스 강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사진은 2021년 11월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회의(COP26)에서 참가자들이 재사용 컵을 사용하는 모습 ©연합

세계화가 가져온 도전에 대응하는 것은 국제사회 전체의 공통 과제다. 세계화의 혜택은 불균등하며 세계화가 가져온 문제들은 무차별적으로 고통을 수반한다. 이와 함께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의 개발로 인한 기후변화는 지구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세계화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혜택을 최대화하는 것, 즉 세계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은 우리 세대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이제는 2015년에 채택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파리 기후변화협약이 제대로 이행될 수 있도록 모든 국가가 진지하게 성찰하고 협력할 때다. 국제사회가 어떻게 글로벌 거버넌스를 회복하고 강화하는지는 인류 공동체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시민 의식(global citizenship)의 필요성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세계시민 의식은 우리가 어느 특정 국가의 시민임과 동시에 인류의 구성원이고 세계의 시민이라는 확장된 정체성을 갖는 것이다. ‘세계시민’의 개념과 역할은 윤 대통령의 유엔 기조연설에서도 강조된 바 있다.

국제적 상황 속 우리나라의 역할을 무엇일까? 이번 기조연설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우리의 외교 정책은 지구적 도전을 극복하고 글로벌 거버넌스 강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한 세대 안에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룬 우리나라는 세계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책임 있는 모습과 행동을 통해 한국의 역할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전쟁, 테러, 지속가능발전, 기후위기, 난민문제 등 지구적 과제에 대처하는 국제사회의 공동노력에도 앞장서야 한다. 이제 우리의 국익이 한반도를 넘어 인류 전체의 지속가능한 미래와 발전에 있음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오 준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
前 주유엔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