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22023.08.

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사단법인 ‘새조위’ 연극배우 강화옥 씨

인내하고 도전하니
‘인생 2막’이 열리더군요


그는 빨간 블라우스에 에코백을 걸친 채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나타났다. 투박한 이북 사투리로 지금까지의 사연을 담담히 털어놓기 전까지는, 외모나 옷차림만으로는 결코 그가 북한이탈주민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올해로 탈북한 지 만 12년이 된, 그중 8년 넘는 시간을 무대에 서온 연극배우 강화옥 씨 얘기다.

강 씨와 마주 앉자 진한 커피 향이 풍겨왔다. 정말 진한 인생 아닌가, 65세에 연극배우라니. 대한민국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도 장년의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게 쉽지 않다. 하물며 오십 평생 살아온 배경과 환경이 다른 탈북민이 남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도전하는 모습은 주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

강 씨는 요즘 연극 연습에 매진하는 중이라고 했다. 대낮부터 시작한 연습이 저녁이 돼야 끝난다는데, 그의 표정에서는 고단함도 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힘 있게 울리는 목소리도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했다. 연극배우 생활이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친구들을 사귈 수 있어 좋다”고 웃으면서 답변을 이어갔다.

“극단에는 젊은 배우가 많아요. 내 아들과 딸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그들과 비슷한 나이일 거예요. 무대 위에서 자식 같은 친구들과 연기를 하는 거죠. 그걸 생각하면 난 참 운이 좋은 것 같아요.”

이제는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탈북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해소하는 데 일조할 수 있어 뿌듯함을 느낀다는 그에게 연습은 힘들기보다 즐거운 시간인 듯 보였다. 강 씨는 “우수한 기량을 가진 사람들과 무대에 선다는 생각에 부담되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극배우로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15년 통인운동단체인 사단법인 ‘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이하 새조위)’이 창단한 극단 ‘찾아가는 통일 강연극’ 소속 배우로 합류하면서다.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탈북민을 위로하고 이들을 둘러싼 오해와 선입견 해소에 앞장서왔다. 2016년부터는 전문상담사로도 활동해왔다.

2016년 1월 새조위가 설립한 ‘탈북민 트라우마 치유센터’ 상담사로 정식 채용돼 서울의료원, 국립중앙의료원 등에서 파견 상담사로 근무했던 것. 2019년 새조위 본부로 옮겼다가 현재는 휴직계를 내고 연기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 딸만 찾을 수 있다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불귀의 객이 된 아들·사위, 행방불명 된 딸
강 씨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인생의 세파에 휩쓸려 국경을 넘어 타지에서 떠돌아야 했고, 때로는 좌절감에 모든 걸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 긴 고난의 시간 동안 인내하고 버틴 것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일이 끝없이 쏟아졌어요.”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북 과정을 떠올리며 꺼낸 그의 첫 마디다. 고난은 장교 출신인 남편이 병을 얻어 몸져누우면서부터 시작됐다. 그에게 가족 생계가 떠맡겨졌다. 당원이라고 해서 일반인보다 급여를 더 많이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북한에서는 노동당 당원이 장마당에서 수입 얻는 것을 금지한다. 군 제대 후 청진시 소재 인민병원에서 간호장으로 근무하던 강 씨 또한 당원 신분으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졌다. 결국 일을 그만두고 친정어머니가 계신 청진시 바닷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아들과 사위가 오징어를 잡아오면, 그것을 장마당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두 남매를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연로한 친정어머니 뒷바라지하고, 아픈 남편 병구완하며 세월을 보냈다.

2016년 5월, 당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미 국무부 지원 ‘북한이탈 주민 홈카운슬링’ 프로그램을
수료한 강화옥 씨에게 수료증을 수여하고있다. (강화옥 씨 제공)
집안 사정이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오히려 감당하기 힘든 불행이 덮쳤다. 2005년 10월 청진 앞바다로 오징어잡이를 나갔던 아들과 사위가 풍랑에 휩쓸려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한순간 남편과 오빠를 잃은 딸이 받은 충격은 오죽했으랴.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2007년 어느 날 갑자기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에는 사람 장사를 전문으로 하는 ‘인신매매 브로커’들이 있다. 대개 중국인인 이들은 돈을 주고 북한에서 여성을 사거나, ‘중국에서 1~2년만 열심히 일하면 큰돈을 모을 수 있다’며 북한 여성을 꾀기도 한다. 매매혼은 그나마 나은데, 악독한 장사꾼을 만나면 탈출하기 어려운 유흥업소에 팔려간다. 더러는 자의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갔다가 막상 오갈 데도, 의지할 데도 없어 결국 유흥업소를 전전하는 경우도 있다. 딸이 사라진 후 강 씨는 수소문 끝에 딸이 브로커 꼬임에 넘어가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딸 찾으러 한국행, 인생 송두리째 바꿔
강 씨는 딸을 찾기 위해 2009년 5월 국경을 넘기로 결심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북한 국경지역과 중국 국경지역은 배를 타고 건너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그러나 그 짧은 거리의 강을 건너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손에 쥔 것은 폭우로 불어난 두만강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고무보트와 연결된 밧줄뿐이었다.

“거센 물결이 바위에 부딪혀 철썩철썩 파도를 만들어내더라고요. 흙탕물을 들이마시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우리 딸은 수영을 잘하니 적어도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겠구나.’ 그땐 우리 딸만 찾을 수 있다면 그곳이 지옥이라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중국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해봤으나 딸을 찾을 수는 없었다. 탈북 경로는 여러 갈래로 나뉜다. 탈북한 사람이 한국에서 브로커 비용을 대주고 데려오는 경우에는 인신매매당할 우려가 없다. 하지만 중국에 브로커 비용을 대줄 가족이 없다면 결국 인신매매 대상으로 전락한다. 강 씨는 중국 선양의 한 장년 남성의 집으로 가게 됐다.

강 씨가 한국행을 결심한 큰 동기는 다름 아닌 딸이었다.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지인이 ‘혹시 딸이 남한으로 간 것은 아니냐, 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보라’며 한국행을 권유한 것이다. 강 씨는 한 개신교 목사 출신 브로커의 도움으로 태국 등을 거쳐 2011년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 도착해 딸 행방부터 찾았다. 하지만 딸은 한국에 없었다. 한국 도착 당시를 회고하던 강 씨 눈가에는 간간이 눈물이 맺혔다.

2022년 12월 10일 서울 강서구 통일부 산하 남북통합문화센터 공연장에서 개최된 통일강연극 ‘新가족의 탄생_우리는 통일가족’ 출연진 모습.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여성이 강화옥 씨다. (새롭고하나된조국을위한모임 제공)
“딸을 찾으러 떠난 길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습니다. 나라에서 임대아파트를 제공해줬는데, 평양 시내 거주하는 노동당 간부가 지낼 법한 대궐같이 느껴지더군요. 황홀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죽음의 고비를 끊임없이 넘어야 했던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쳤어요. 죄책감도 느꼈습니다. 어머니와 남편을 두고 나 혼자 한국에 오게 됐으니까요.”

강 씨 가슴에 맺힌 가장 큰 한은 탈북 도중 붙잡혀 북송된 어머니와 조카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등을 취득해 통일부가 지급하는 수당 360만 원을 모아 북한에 있던 어머니와 조카를 탈북시키려다 중국 옌지(연길)에서 공안에게 붙잡혀 도로 북송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북한에 거주하는 친인척과 브로커 도움으로 보위부로 넘어가기 전 어머니와 조카를 무사히 빼낼 수 있었다.

가족을 잃고 낯선 환경에 던져진 강 씨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은 통일운동단체 ‘새조위’다. 새조위는 탈북민의 심리 치유와 교육, 의료지원센터를 통한 의료 상담, 정착을 위한 역량 강화 교육 등을 수행한다. 1988년 10월 설립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운동단체로 꼽힌다. 강 씨는 2015년 한 해 동안 경기도 용인과 서울 종로구 새조위 사무처를 매일 오가며 ‘탈북민 코칭 과정’, ‘탈북민 전문상담사 3급 보수교육’ 등의 프로그램을 이수하며 상담 훈련을 받았다. 새조위가 창단한 찾아가는 통일 강연극에 합류해 연기 활동도 시작했다.

탈북민 출신 전문상담사로 활약
그의 이 같은 치열함과 절박함은 낯설고 외로운 남쪽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2015년 탈북민 전문상담사(3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미국 국무부 지원으로 새조위가 진행한 ‘탈북민 홈 카운슬링’ 프로그램을 통해 탈북민 출신 상담사로 선발됐다. 이후 새조위는 강 씨를 2016년 1월 탈북민 트라우마 치유센터 전문상담사로 정식 채용했다. 그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강 씨는 요즘 연극배우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런데 무대에 오를수록, 연기 세계에 깊이 빠져들수록 강 씨 고민은 커져간다. 탈북민의 탈북 과정, 남한 정착 이야기, 인권 문제 등 민감한 소재를 대중의 입맛에 맞춰 각색해야 하는데, 그 창작의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남북관계 역사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군에서 김일성 일가의 신격화, 우상화 교육을 받아 머리에 박힌 주체사상을 깨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강 씨는 “역사책을 탐독하고 저명한 국내 학자의 강의를 거듭 들은 끝에 한반도 역사를 제대로 배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경을 넘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강 씨. 그는 “이런 인생사를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격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난 시간은 낮 12시. 슬쩍 위를 올려다보니 해가 쨍쨍하고 하늘이 푸르렀다. 그 하늘이 말하는 듯했다. 인고의 시간을 감내하노라면 또 다른 삶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