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22023.08.

통일비전

권재일 한글학회 이사장(전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장)

“겨레말큰사전, 통일 이후
갈등 극복 위해 꼭 필요해요”

1945년 광복 직후 남과 북이 분단된 지 벌써 7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럼에도 서로 소통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건 바로 우리 ‘한글’ 덕분이다. 서울 종로구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한글학회 건물 5층 권재일 이사장 사무실. 그의 책상 위에는 갓 출간된 ‘미리 만나는 겨레말작은사전’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겨레말작은사전은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통일을 대비해 6월 말 내놓은 아주 특별한 사전이다. 남북한에서 서로 달리 쓰이는 북한 단어 3053개가 실렸다. 예를 들어 더하기와 빼기, 곱하기, 나누기의 네 가지 셈법을 뜻하는 ‘넉셈’, 가위바위보 놀이를 뜻하는 ‘가위주먹’, 다이어트를 의미하는 ‘몸까기’ 등과 같은 단어들이다.

남북 국어학자들이 2005년 2월, 금강산에서 남북 언어의 이질화를 막기 위해 ‘남북공동편찬위원회’를 구성하고 편찬하기로 뜻을 모았던 ‘겨레말큰사전’의 축약본에 가깝다. 편찬 막바지까지 진행됐던 겨레말큰사전은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사건을 계기로 전면 중단됐다. 2015년 12월 한 차례 회의가 열렸지만 그 이후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때까지 남북 학자들이 겨레말큰사전에 싣기로 합의했던 30만7000여 단어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 이번에 나온 겨레말작은사전이다.

이런 상황이 누구보다 안타까운 이가 바로 권재일 한글학회 이사장이다. 남북공동편찬위원회 구성 초기부터 참여했던 권 이사장은 2008년부터 2009년까지 1년간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제2기 남측편찬위원장을 맡아 남북 학자들 간 협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에게 겨레말큰사전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통일이라고 하는 것이 정치·경제·사회적인 통일도 중요하지만 문화적인 통일이 대단히 중요해요. 그 핵심이 바로 언어의 통일이죠. 만약 의사 전달의 도구인 언어가 다르면 사회적인 갈등과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걸 극복하려면 남북 언어 통합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 바로 겨레말큰사전이 갖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 ‘화법 차이’ 극복이 가장 큰 과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어’의 기준은 서울말이다. 반면 북한이 사용하는 ‘문화어’는 평양말을 기준으로 일부 지방 방언을 포함하고 있다. 이를 정리해 남한에서는 ‘표준국어대사전’을, 북한에서는 ‘조선어큰사전’을 펴냈다. 두 사전의 뿌리는 같다. 바로 1930~4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조선어학회(한글학회 전신) 소속 학자와 회원들이 온몸으로 지켜낸 ‘(조선말)큰사전’이다. 권 이사장의 설명이다.

“한글학회가 1933년에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들고, 1936년에 표준말을 사정(査定)했잖아요. 그때 사전을 편찬했던 분들 중에 학회 간사장을 했던 이극로 선생과 몇 분은 북으로 갔고, 최현배, 정인승, 정태진 선생 같은 분들은 남쪽에서 학회를 재건해 사전 편찬을 시작했죠. 다행히 광복 이전에 한글맞춤법 표준말 사전을 만들어뒀고, 같은 일을 했던 분들이 남북으로 나뉘어 연구를 이어갔기 때문에 그나마 남과 북의 언어 차이가 크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남과 북이 똑같이 사용하고 뿌리가 같은 우리말이 어떻게, 왜 달라진 것일까. 북한은 1966년 한글맞춤법 표준말을 폐기하고 ‘문화어’라는 북한판 표준말을 만들었다. 이때 평양말에 채소를 ‘남새’로 부르는 것과 같은 지방 방언이 대거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무려 5만 단어를 북한식으로 강제 순화시켰다. 그중 절반인 2만5000단어는 오랜 기간 사용되지 않자 1990년 폐기했다.

여기에 이념적인 의미를 덧붙인 단어들이 생겨났다. 예를 들어 ‘세포’와 같은 단어다. 남한에서는 주로 ‘생물체를 이루는 기본 단위’로 사용되는 반면 북한에서는 주로 ‘공산당의 말단 조직’을 뜻하는 단어로 변질된 것이다. 남한에선 무분별하게 외래어와 외국어를 받아들였다.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외래어다.

어휘의 차이뿐만 아니라 화법의 차이도 커졌다. “남측의 화법은 간접 화법 중심인 반면 북측은 직접 화법 중심”이라는 권 이사장은 어휘보다 화법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문화적 갈등을 더 걱정한다.

“지나가는 말로 ‘언제 차 한잔 하자’고 하잖아요. 우리는 그냥 인사치레로 생각하는데 북한 사람들은 그 연락을 기다려요. 연락이 없으면 언짢아하면서 상대방을 신뢰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죠. 반면 북한 화법에는 감사나 사과가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 도와주면 ‘고맙다’거나 지나가다 툭 건드리면 ‘죄송하다’고 해야 할 텐데, 북한에서 그런 말을 쓰면 오히려 사람이 가볍다, 뭐 그만한 일에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핀잔을 듣는다고 해요. 우리는 예의도 없고, 고마움도 모르는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이런 화법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남북 언어 통합을 위해 극복해야 할 제일 큰 과제라고 생각해요. 단어는 겨레말큰사전이 나오면 다 해결해줄 거고요.”

“큰 걸 하나 얻고 통 크게 양보하자”
그렇다면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은 어느 정도까지 진행하다 중단된 걸까. 남북 학자들은 금강산을 시작으로 2010년 초까지 서울과 평양, 개성, 베이징, 선양, 다롄 등을 오가며 한 해에 4~5차례씩 모두 24차례 회의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상당 부분 협의를 이뤄냈다. 물론 그 중심에 권 이사장이 있었다.

2008년 5월 12~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위원회 제14차 회의. 가운데 오른쪽이 권재일 당시 남측편찬위원장이다.

사전 편찬을 위해 남북이 협의해야 할 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표기법과 같은 어문규범과 사전에 올릴 표제어, 그리고 뜻풀이였다. 먼저 어문규범과 관련한 첫 안건은 자음의 순서를 정하는 것이었다. 남북 사전의 배열 순서가 달랐다. 가장 다른 부분은 소리가 안 나는 o(이응)의 위치. 우리는 ㅅ과 ㅈ사이에 위치하지만 북한 사전에선 맨 뒤에 뒀다. 시작부터 협의가 쉽지 않았다.

권 이사장은 “큰 걸 하나 얻고 통 크게 양보하자”고 생각하고 밀어붙였다. o의 위치를 지키는 대신 나머지는 북한사전 순서대로 다 양보한 것. 그렇게 정해진 순서가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ㄲ ㄸ ㅃ ㅆ ㅉ’이다. 그다음부터 남북 간 협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모음 순서도 북한사전 순서대로 하기로 했다. 두음법칙과 사이시옷 정도만 남았는데, 이 두 가지도 거의 합의 직전 단계까지 갔다.

“사실 두음법칙은 어느 한쪽도 양보하기 쉽지 않아요. 괜히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다 판이 깨지기보다는 병기하는 방법, 예를 들어 ‘역사’와 ‘력사’를 복수로 인정하자는 거죠. 사이시옷도 거의 합의를 봤어요. 우리는 사이시옷을 써야 할 기본조건이 있잖아요. 하지만 북한에서는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일절 사이시옷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와 ‘냇가’처럼 구분이 필요한 것만 남북이 같이 쓰고 나머지는 똑같이 안 쓰는 쪽으로 하자. 예를 들어 장맛비, 학굣길, 만둣국 같은 건 우리가 양보하겠다고 했죠. 우리 국민도 편하고.”

표제어는 남북한 사전에서 25만 단어 정도를 뽑고, 남과 북의 문헌과 지역 방언, 중국 조선족과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사용하는 우리말까지 모아서 5만 단어는 완전히 새롭게 찾아서 담았다. 대신 남북한에서 사용되는 정치적인 용어는 최대한 배제했다. 그렇게 모은 단어가 모두 30만7000여 개에 달했다.

마지막 남은 뜻풀이도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남북이 15만여 개씩 반반 나눠 먼저 정리를 하고 서로 교환해서 검토한 후에 다시 만나서 최종 협의해서 완성하기로 했던 것. 그런데 남측이 맡은 15만여 단어 뜻풀이는 끝났고, 북측이 맡았던 15만여 개 중 3분의 1 정도 진행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중단된 이후 남측 학자들이 북측이 끝내지 못한 나머지 10만여 개의 단어 뜻풀이까지 마무리해 이제 북측과 최종 협의만 남겨둔 상태다. 권 이사장은 뜻풀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난감했던 경험 한 토막을 털어놨다.

“남과 북이 뜻풀이가 전혀 다른 것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동무’ 같으면 남한 사전에는 친하게 지내는 동료인 반면 북한 사전에는 뜻을 같이하는 동지의 의미로 쓰이는데 어떤 풀이를 먼저 나오게 해야 하는지. 또 ‘어버이’ 같으면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인데 북한에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 이상으로 자신을 돌봐주는 수령을 뜻하는데, 그 이념적인 차이를 조정하는 것이 사실 제일 어려웠어요.”

통일 앞두고 ‘남북 언어 통합’ 대비 의미
남북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언제 재개할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천안함 사건 이후 중단됐던 남북공동편찬위원회 회의는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 때 한 차례 열린 게 마지막이다.

서울대 언어학과 72학번으로 국립국어원 원장과 한글학회 회장, 한글학회 이사장 등 주요 기관장을 두루 역임하며 한글 연구와 발전에 한평생을 바쳐온 권 이사장. 겨레말큰사전을 완성하는 게 어쩌면 그의 간절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사전은 1~2년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히 완성할 수 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시작했을 때 우리가 이걸 만든다고 해서 당장 남과 북에서 시행하자는 건 아니었어요. 통일을 앞두고 사회적, 문화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 언어를 어떻게 통합해나갈 것인가 대비하자는 의미가 컸죠. 그래서 사전을 완성해도 남과 북의 현행 언어규범을 통제하지 않는다는 걸 대원칙으로 삼았어요. 다만 남과 북이 합의한 내용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더 합리적이라면, 우리 국민에게 더 편리하다면 통일 이전에라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