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92024.5.

북한 리얼 스토리

인권 사각지대를 딛고 평화를 꿈꾼다

‘가려진 세계를 넘어’

지난 2021년 5월 영국 지방선거에서 보수당 후보로 맨체스터 지역 구의원에 출마한 탈북민이 화제가 됐다. 그녀의 이름은 박지현 씨. 2008년 영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새 보금자리에 정착한 후 13년을 보낸 박 씨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지역에서 북한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학교 운영회 이사(school governor)’로 남편과 아이 셋을 두고 살고 있는 그녀의 삶도 여느 탈북민과 마찬가지로 기억하기도 믿기도 힘든 고난의 시간을 지나왔다. 단지 북한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독한 굶주림과 힘겨운 탈북, 중국에서의 매매혼과 출산, 강제북송 및 수용소 생활, 재탈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배우는 것 특히 수학을 좋아했던 지현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출신 성분이 좋은 아버지와 계급 성분이 낮은 어머니 사이에 1남 2녀 중 둘째였던 그녀는 인민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에 속했다. 노동력이 부족한 북한에서 학생들은 매 학기 농촌동원에 나가야 한다. 해마다 4월이면 집 밖에서 40일 정도를 보냈고 쌀과 강냉이를 수확하러 가는 10월에는 2주 정도면 끝이 났다. 그도 겨우 열세 살에 첫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어머니의 낮은 계급 성분은 결국 자녀들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984년 언니가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 대회에서 1등을 했는데도 국가에서 추천하는 연구원으로 선발되지 못한 것이다. 학급 위원에다 학교 임원회 회장을 맡고 있었고 인생을 걸고 공부했지만 소용없었다. 여전히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아버지는 술을 마셨고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탕! 탕! 탕! 반동분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자마자 총성이 울렸다.
병사 세 명이 각각 머리, 가슴, 무릎을쏘았다.
슬프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한 발씩 총알을 맞을 때마다 몸이 아래로 꺾어지고 사방에 피가 튀었다.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목격한 공개처형은 끔찍했다. 언니와 남동생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딱 돌아왔을 때 인민반장이 반동분자가 처벌받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퇴근 무렵 처형 장소인 강둑 위에는 학생들과 주민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반동분자의 죄명은 소를 죽인 것이었다. 처형 광경은 처참했고 그 많은 사람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가족들 역시 식사 후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까 본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국 대학 입학시험에서 3등을 했지만 평양대학교 진학의 꿈은 좌절됐고 청진농업대학에 입학했다. 1991년 학교를 졸업한 후 스물세 살, 북청진 새거리동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뇌물을 써서 농부의 삶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10여 년에 걸쳐 엄청난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나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있었다. 배급은 끊겼고 생활은 마비됐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20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플뢰르 펠르랭 전 문화부 장관(가운데)과 함께 사진을 찍은 두 저자. 왼쪽이 탈북한 박지현 씨,
오른쪽이 한국 출신 채세린 씨. (동아일보)
“견디기 힘든 현실이었다. 큰아버지는 굶주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쥐처럼 먹을 것을 찾아 흙 속을 헤집으며 살고 있었다.
저항은 불가능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떻게든 자신의 운명을 정당화하는 수밖에 없다.”


1998년 2월 21일, 그녀는 형부와 언니 그리고 조카에 함께 15분 만에 북한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했다. 1년 전 중국으로 떠난 어머니는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동생은 나라에 쫓기는 몸이 된 상황에서 무조건 살아남기 위해 병든 아버지를 두고 떠난 길이었다. 중국 도문에서 같은 과정을 통해 탈북한 남동생을 만났다. 가족은 훈춘을 거쳐 어머니가 살고 있다는 밀강으로 갔다. 어머니는 작은 시골집에서 한 씨라는 중국 조선족 남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날 밤 돌아올 수 없는 운명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 영혼을 더럽힌 것은 어머니와 언니의 배신이었다.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던지 그 배신이 내게 준 고통의 크기의 비하면 북한계 중국인 남자가 준 그날의 치욕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이유를 대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였다.”


“박지현! 5천 위안!” 그녀가 팔리던 순간이다. 막 그녀를 구입한 사람은 마흔여섯의 조선족 김성호였다. 1998년 4월 22일, 부부가 된 둘은 목단강에서 버스를 탔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계속 사이로 난 길을 세 시간 달려 도착했다. 버스가 멈춰 섰을 때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노예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남편 성호는 도박을 좋아하고 매일같이 술과 담배에 절어 이웃을 헐뜯으며 지냈다. 결국 혼자 밥과 김치만 놓고 먹는 노예, 낮에는 밭을 갈고 저녁에는 청소와 음식을 하고 밤에는 남편의 요구에까지 응해야 하는 그런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1999년 3월 20일, 남자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언니와 남동생이 찾아왔다. 2년 만에 열정적으로 서로 얼싸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2000년 5월 10일, 다 같이 아침 식사를 한 뒤 떠날 채비를 했다.
그게 우리 가족의 마지막 식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형부의 탈출 계획을 도와주었다던 남자였다.
‘상철이와 정호가 체포되었어요’”


위조 신분증으로 가족과 하얼빈 변두리 시장에서 어렵사리 장사하고 살던 2004년 4월 21일, 중국 공안이 집을 덮쳤다. 그녀는 하얼빈 교도소와 도문 수용소를 거쳐 고향 청진 도 직결소로 이송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치범이 아니라 경제범으로 분류된 것이다. 깨진 유리조각을 밟아 왼쪽 발이 퉁퉁 부은 채로 출소해 상처가 아물어가던 어느 날 나남 주위에서 브로커가 다가와 중국 밀입국을 제안한다. 기회가 온 것이다. 중국으로 넘겨주는 대가는 하나다. 인신매매로 그녀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밤중에 두만강을 건넌다.

그녀가 겪은 고난의 시간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북에서 온 박 씨 삶을 기록한 사람은 남에서 온 채세린 작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자 필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