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통합
남북통합문화센터 ‘공동취미구역’ 현장 탐방
“취미생활 공유로 남북 통합 이끌어낼 수 있어요”
‘취미생활을 통해 남북 주민 간 동질성을 회복하고 문화 공감과 소통의 장을 도모하는 과정’. 남북통합문화센터가 3월부터 11월까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남북 통합 프로그램 ‘공동취미구역’을 소개하는 글의 한 부분이다. 공동취미구역은 영화 ‘공동경비구역’에서 따온 말로, 남북통합문화센터가 취미생활을 통해 남북 주민이 소통할 수 있는 구역으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남북통합문화센터는 2020년 5월 문을 열었다. 최근 남북 갈등이 심화하면서 남북 주민이 문화를 매개로 화합을 도모하는 공간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 남북통합문화센터 3층 게시판 앞. 게시물에 쓰인 이 문장이 시선을 붙들었다. ‘소통의 장 마련’, ‘정서적 동질감 회복’, ‘문화적 이해와 소통’은 이 남북 통합 프로그램 관통하는 메시지다. 센터는 보자기 아트, 한복, 비누 등 매달 새로운 공방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을 위해 만든 ‘하루 공방(월 1회 2시간 과정)’, 대중가요를 통해 남북 주민 간의 정서적 동질성을 회복하는 ‘남북가요 공감대-너나들이 노래교실 1기(매주 토요일 2시간 과정)’, 아코디언 연주를 통해 남북 주민의 문화적 이해와 소통을 도모하는 ‘손쉬운 아코디언’ 등 다양한 특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가 주관하는 프로그램으로 넓고 쾌적한 시설, 탄탄한 강의에 전문 강사진까지 갖춘 수업이다. 탈북민들의 남한 사회 적응을 돕는 한편 남북 주민의 정서적 공감대 확산을 목표로 한다.
정서적 동질감 회복, 문화적 이해 높여
4월 20일 오후 3시 30분, 나른한 주말이지만 남북통합문화센터 3층 다목적 체육실은 ‘너나들이 노래교실’에 참여하는 ‘신중년’ 수강생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이날 다룬 노래는 남한 사람에게도 익숙한 북한 대중가요 ‘반갑습니다’와 ‘휘파람’. 노래교실 강사 박해상 씨가 강의실에 등장하자 일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방송인이자 가수로 활동하는 박 씨는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해설로 호평을 받은 ‘박해상의 노래이야기-역사 in 가요’ 저자이기도 하다. 박 씨의 입에서 통일 1호 가수 김혜영의 이름이 거론되자 몇몇 탈북민이 반가움을 드러냈다. 김혜영은 북한 특유의 억양과 발성법은 한계가 있다는 주변인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남한에서 인기를 얻은 몇 안 되는 탈북민 가수다.
강연 막바지에 박 씨가 “김혜영이 북한식 창법을 버리고 남한 창법을 구사했다면 ‘반갑습니다’ 노래 특유의 맛을 살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가요계 통념을 깨고 인기몰이에 성공한 것처럼 여러분도 사회적 통념에 짓눌리지 말고 담대하게 전진하기를 바란다”고 응원의 말을 건네자 일부 수강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2시간이 넘는 강의가 끝나자 수강생들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주고받았다.
남북통합문화센터 ‘하루 공방’ 수강생들이 식물을 활용한 공방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1998년 탈북해 2003년 남한에 정착한 마순희 씨는 센터 직원이 프로그램 성격을 설명하면서 ‘대중가요 테크닉만 배우지 않고 노래에 담긴 의미를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풀어낸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첫 수업을 듣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북에서 대중가요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노래를 듣기만 하고 부르지 않게 되면서 그동안 꾹꾹 눌러둔 감정이 많았던 것 같다. 노래방을 가도 ‘사람들 노래 부르는 모습을 구경하겠다’ 하며 숨겨온 마음 말이다. 그렇게 뭉쳐 있던 것들이 노래교실을 통해 확 풀어졌다. 북한 대중가요 ‘임진강’이 한때 남한에서 금지된 이유를 알고 나니 궁금증이 풀리고 한민족으로서 공통된 정서도 느꼈다.”
마 씨의 이야기다. 그는 1년 전 센터가 주최한 ‘남북생애나눔대화’ 에 참여한 일을 계기로 남북 통합 프로그램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때 통합의 가치를 느끼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참여할 것을 권했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돌아보면 나는 남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북한식 억양은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게 습관으로 굳어져 남한 사람과 간단한 대화를 할 때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노래교실에서 한민족의 공통 정서를 느끼고 문화적으로 공감하고 나니 이것이 굉장히 힘 있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더라. 사회가 남북 주민 간 소통과 화합을 강조하는데, 내 경험으로는 대중가요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편이 남북 주민 통합에 훨씬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강사 박 씨는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노래교실이 많이 열리지만 대부분 창법 같은 테크닉을 중심으로 가르친다”면서 “남북통합문화센터 설립 취지에 맞게 이분들이 남북 통합의 가치를 깨닫고 이를 일상 속에서 실현하려면 어떤 수업이 좋을까 고민하다 인문학 관점에서 바라보는 남북 대중가요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중·장년층 연령 특성상 남북 주민들과 편안히 소통할 수 있고, 노래 부르는 행위가 남북 분단고착화로 형성된 문화 차이를 해소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탈북민 선입견 깨진 게 가장 큰 수확”
올해 3월 처음 개설한 노래교실에는 매주 토요일마다 남북 주민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4월 말 현재 노래교실 수강생 수는 30명 정도. 남한 주민 15명, 북한 주민 15명으로, 당초 예상한 모집인원 수를 훌쩍 넘었다. 수강생 연령층은 50대부터 80대까지 중·장년층이 주를 이룬다. ‘노래교실이 좋다더라’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벌써 2기 노래교실 개강일자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노래교실 담당자인 김지연 통합체험팀 연구원은 “며칠 전에도 중년 남성이 하반기 노래교실 개강일자를 문의했는데, 노래교실 1기는 7월 13일 종강하고 노래교실 2기는 8월 3일 개강해 11월 23일 종강할 예정”이라며 “대중가요를 통해 노래 가창뿐만 아니라 주제곡에 담긴 역사와 시대상을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별, 연령에 관계없이 환영한다”고 말했다.
‘남북가요 공감대-너나들이 노래교실’ 1기 수강생들이 대중가요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수강생들 사이에서는 중·장년층 또래와 관계를 맺고 도움을 주고받는 분위기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이호철 씨는 노래교실을 통해 탈북민에 대한 선입견이 해소됐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생업이 바빠 탈북민도 통일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나’ 하는 생각에 알아보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래교실에서 북한 대중가요에 녹아든 북한 주민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을 회복하고 탈북민을 이해하는 마음이 커졌다. 이 씨는 노래교실 수강이 일상에 미치는 점으로 남북 대중가요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궁금해하며 스스로 자료를 찾아보게 된 것을 꼽았다. 이 씨는 “책과 드라마 등 이것저것 살펴보면서 북한에 대한 인식이 편향됐음을 깨달았다”면서 “북한 정치는 물론 북한 주민의 특성과 실상을 바로 보게 된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취미활동 통해 남북 주민 ‘소통의 장’ 꾸려
이날 찾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는 노래교실 외에도 아코디언, 공방 수업이 열렸다. 나영선 통합체험팀 연구원은 취미를 내건 남북 통합 프로그램이 남북 주민의 문화적 이해와 소통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나 연구원의 설명이다.
“누구나 남북 주민이 화합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남북 주민과 소통하러 오세요’ 하면 여전히 방어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민이 많다. ‘취미활동을 하면서 남북 주민과 어울려요’ 하면 훨씬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나. 이처럼 취미활동을 구실로 남북통합문화센터의 문턱을 낮추면 여러 긍정적인 변화가 시작될 거라고 본다.”
‘손쉬운 아코디언’ 특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수강생들의 모습.
노래교실의 경우 1기 수강생들은 노래의 배경, 사연, 해설, 가창 등 소정의 발표 과정을 거쳐 한양대학교 갈등문제연구소로부터 ‘남북가요공감대 수료증’을 받는다. 센터는 올해 하반기 2기 노래교실 수강생을 모집할 때 기초반에 이어 심화반 개설을 검토하고 있다.
이처럼 남북 통합 프로그램이 독특하면서도 내실을 탄탄하게 기하게 된 데는 그동안 센터가 사업을 추진하며 쌓은 노하우 덕분이다. 이준호 통합체험팀 팀장은 “지난해에 기획한 ‘2023 전국 탈북민 노래자랑’의 성공을 바탕으로 팀원들과 강사, 수강생 모두가 남북 통합 프로그램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다”며 “탈북민 3만 시대를 맞아 앞으로도 탈북민들과의 정서적, 문화적 공감대를 확대할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해 추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김건희 기자 사진·이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