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12022.09.

2021년 12월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의 사전행사가 열린 서화리 대피소 극장에서 주민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예술로 평화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

“남북의 마을과 마을을 영화로 잇는
축제를 꿈꿉니다”

영화 세트장과 같은 빨간 외벽을 배경으로 둔 앞마당에 마을 사람들이 속속 모여든다. 한 아이가 슬레이트를 치자 즉흥적인 영화촬영이 시작된다. 이웃집 부부는 연애시절 함께 봤던 영화의 추억을 되살려 대본도 없이 대사를 주고 받는다.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마을 주민들이 배우이자 관객인 특별한 무대
영화촬영이 배경이 된 이곳은 우리 부부가 쌍둥이 남매 하륵·하늬와 함께 살고 있는 집 앞마당이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서화 2리. 일명 ‘서화리 영화마을’로 불리는 곳이다. 우리 가족이 서화리로 온 건 2017년 겨울이었다. 독립영화를 하다 2000년부터 ‘마을영화’라는 장르를 개척한 필자는 영화판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경기도 양평에 정착했다. 그곳의 주민들과 친해지며 자연스레 마을 주민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제작하게 됐다.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마을 주민이 직접 배우가 돼 찍은 영화는 상업영화나 예술영화가 갖지 못하는 진솔함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부부는 ‘마을마다 마을영화’라는 모토를 가지고 전국 각지를 돌며 마을영화를 제작했다. 그런데 2017년 봄, 집을 비운 사이 양평 자택이 화재로 전소됐다. 꼼짝없는 유목민 신세가 된 우리는 ‘차박’이 가능한 5톤 트럭에서 잠을 청하며 전국의 공영 주차장을 떠돌았다. 그렇게 1년 여를 전전하던 중 한반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곳으로 흘러들어 오게 됐다. 정이 많은 서화리 주민들은 빈집으로 있던 다세대 주택 하나를 외상으로 빌려줬다. 그렇게 우리는 서화리 주민이 됐다.

인제군 서화리는 북한 내금강에서 약 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최북단의 마을로 주민 대부분이 70~90대의 어르신들이다. 100여 개의 마을을 돌며 주민들과 영화를 찍어온 우리 부부는 이곳에서도 ‘마을영화’ 전문가의 면모를 어김없이 발휘했다. 독거미에 물려 춤을 추는 시나리오로 서화리 주민들을 춤추게 만든 ‘타란툴라의 춤바람’부터 DMZ마을 아이들의 사계절을 그린 ‘천사는 쏜살같이 여린 자를구하라’, 강원도 마을을 찾아온 6·25 전쟁 유해발굴단 이야기를 다룬 ‘살아가는 기적’까지 서화리 마을 주민들을 주연으로 한 3편의 영화를 찍었다. 마을 사람들은 곧 연기자이자 스태프가 됐다. 어르신들은 연기를 하고 슬레이트를 치는 일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영화라곤 경험한 적 없었던 어르신들은 이렇게 마을영화의 배우가 됐고 마을영화제를 통해 자신들의 연기를 진지하게 감상했다. “영화배우가 되는 걸 꿈이라도 꿨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해 보니 되긴 되네요.” “잠이 안 와! 너무 좋아서.” 우리 영화제에서는 밑변의 삶의 시간들이 영화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는 형식과 규모가 갖춰진 완벽한 영화제보다 지역민들과의 자유로운 교류로 만들어 낸 ‘로컬리티’를 담은 영화제를 꿈꾼다.

지난 7월 인천마을영화제에 참석한 국내외 감독들

서화리의 신지승 감독 자택 옆에 마련된
야외 상영관

어설프지만 순수한 끄트머리의 삶을 담다
서화리를 세상에 알린 건 한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통해서였다. 화재 사고 이후 서화리로 흘러들어온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길 위의 빛들’이 경기도가 주최하는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받게 된 것이다. 영화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참여하는 감독들도 늘어났다. 2018년 소박한 영화제로 시작한 ‘끄트머리 마을영화제’는 2020년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가 됐다. 작년부터 올 상반기까지 85개국에서 750여 편의 영화가 출품됐고 인천, 파주, 태백, 조치원, 영주, 부산, 제주 등 15개 지역의 협력과 후원으로 올해도 끄트머리의 삶을 소개하고 있다. 이 같은 관심에도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는 완벽함보다는 로컬의 소박함을 앞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최고보다 모자람, 어설픔, 엉성함 속에 담긴 순박함과 순수함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게 우리 영화제의 정신이자 방향이다. 완벽함만을 추구하면 개개인의 감성과 인간성이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고 시스템과 효율적인 분업만이 살아남게 될 것이다.

사실 ‘끄트머리’는 절벽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연결하는 문이다. 해외에서 ‘끄트머리’를 소개할 때 ‘꽉 막힌 궁지’를 뜻하는 ‘아포리아(aporia)’로 소개하는 이유도 궁지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는 평화통일의 길에도 적용된다. 평화가 요원해 보이는 위기의 순간에도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은 시작된다. 몇 해 전부터 필자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다. 남북 주민들이 함께 웃고 즐기며 남과 북의 마을과 마을을 영화로 잇는 꿈이다. 남북한 주민들이 서로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채우며 함께 끄트머리의 삶을 나누는 ‘끄트머리 남북마을영화제’를 상상해본다. 이윽고 남과 북에서 만든 마을영화를 함께 감상하며 축제를 벌이는 상상이 이뤄지길 바란다.

신 지 승 끄트머리 국제마을영화제
집행위원장,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