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822021.12

예술로 평화

“남북이 함께한 영화 ‘광대’
남북의 산하와 소리 담다”



  2018년 11월, 나는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한 세계 해외동포기업인 평양대회에 참여하는 남측 수행단으로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내렸다. 북측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인사들의 환호와 함께 일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대동강맥주공장, 김정숙평양제사공장 등 산업시설들을 둘러보며 경제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행보를 바로 시작했다.

소리꾼 티저 포스터
가슴 벅찬 문화 통일의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
  대회 삼일째, 빠듯했던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난 저녁. 몇몇 분들과 유일하게 출입이 허락된 호텔 내 주점에서 이야기꽃을 피울 무렵, 내내 함께했던 북한 민경련 측 인사들이 자연스럽게 합석했다. 나는 품속에 소중히 안고 왔던 시나리오를 꺼내 들며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고, 북측 인사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가 있던 좌석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이야기가 깊어 갈 즈음, 남과 북의 사람들 간에 노래가 오고가기 시작했다. 나는 일어나서 <임진강>을 불렀고 북측은 답가를 불렀다. 긴장이 풀어지며 모두 가슴속에 있는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마치 동네 형 동생이 된 것마냥 서운했던 마음도, 좋았던 마음도 봇물 터지듯이 흘러 나왔다. 다음날 쉽사리 잠들지 못하다가 겨우 눈을 붙였을 때, 영화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며 밤새 술을 마신 참사가 옷매무새를 갖춘 채로 잠시 나올 수 있는지를 물었다.

평안북도 향산군 향산읍 묘향산 비로봉
  급히 씻으며 마음속에 온갖 생각이 스쳤다. ‘무슨 일이지?’ 5분도 안 되어 로비로 나갔다. 로비 한 모퉁이에 위치한 커피숍엔 밤새 함께했던 북측인사와 일정 내내 보지 못했던, 처음 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손짓에 이끌려 자리에 앉자 처음 보는 북측 인사가 테이블에 무언가를 꺼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광대> 시나리오와 제작기획서였다.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시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북측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사람들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 급진전하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맞추어 우리 영화의 진척 속도도 빨라졌다. 베이징에서 세 차례 미팅이 있었고, 북에서의 촬영과 일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도 논의했다. 올소꾼 (보조출연)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 가고, 로드무비에 맞는 구체적인 장소도 협의했다. 영화가 완성되면 평양과 서울에서의 동시 상영을 추진하자는 이야기도 나누며 가슴 벅차했다. 평양에서 경험한 매 순간이 기적 같고 치열했다. 2019년 4월에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나면 공식 헌팅 촬영을 하기로 하고, 베이징에서의 마지막 회담을 끝으로 기쁜 마음으로 각자 평양과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안타깝게도 합의 불발로 끝났고, 기적처럼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봄이 다시 한 번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했다.

황해북도 신평군 금강명승지 범바위
필연이어야 할 평화, <광대>가 밀알 되길
  영화 <광대>는 조선 영조 10년, 사라진 아내 간난을 찾아 나선 소리꾼 남편 학규와 딸 청이가 길 위에서 만난 파계승, 몰락 양반, 장돌뱅이 등과 함께 조선팔도를 돌며 흥과 한이 담긴 여정을 그린 이야기이다. 비록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한 가족의 ‘헤어짐’과 ‘만남’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남과 북의 만남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우리의 전통 예술인 ‘판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감독의 상상으로 말하며, 이웃공동체란 궁극적으로 진정한 의미로의 가족을 복원하는 것이라 역설한다. 북측에서 이 이야기에 전폭적인 관심과 지지가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다. 판소리뿐 아니라 북한의 민요를 포함한 한반도 전역의 민족음악이 영화 속에 녹아 있고, ‘심청가’나 ‘춘향가’ 같은 우리의 고전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작가적 상상이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평안북도 향산군 향산읍 묘향산 만폭동
  비록 합의한 대로 본격적인 영화 촬영을 진행하지는 못했지만, 혹시나 모를 본 촬영을 위해 재일교포 스태프를 통해서 3주간 북에서 풍경을 촬영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22년 초에 개봉을 앞두고 있는 <광대: 소리꾼 감독판>에는 북한의 묘향산 범바위, 만폭동, 보련대를 비롯하여 신평군 남강, 금강 명승지, 강원도 소두류산, 울림폭포 등이 담겨 있다. 남쪽 전역에서 촬영한 아름다운 우리 강산도 스크린으로 옮겼다.

평안북도 향산군 향산읍 묘향산
  3차에 걸친 남북 정상회담과 남·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한 그간의 귀한 성과들을 이어서 반드시 이뤄질 남북의 평화. 그리고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통일은 필요가 아닌 필연일 것이다. 그 길에 우리 영화 <광대>가 작은 밀알이 되길 바란다. 모든 논쟁을 넘어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문화와 전통으로 하나 되는 한반도를 꿈꾼다. 나의 생에 남북 공동합작영화를 다시 한번 도전하여 이뤄 내리라.

조정래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