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155마일
⑧ 인천시 옹진군 영흥도
대한민국을 구한
숨은 영웅들 넋 서려
인천시 옹진군 영흥면에 위치한 영흥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이곳에 세워진 해군 영흥도 전적비를 보고 의아해한다. 면적 23.46㎢ 규모의 작은 섬에 6·25전쟁 인천상륙작전 전초기지를 기념하는 해군 전적비 공원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공원은 면적 1289㎡(약 390평) 부지에 높이 1m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전적비에는 영흥도 주민으로 조직된 6명의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이름과 해군 영흥지구 전투 전사자 8명의 이름, 계급 등이 적혀 있다. 전적비 중앙에 헌화대가 마련돼 있는데, 그 왼쪽으로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새긴 비석이 놓여 있다.
비문을 살펴보면 북한의 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1950년 9월 15일, 국군과 국제연합(UN)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내도록 초석 역할을 한 전투에 이들이 참전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을 읽고 나니 6·25전쟁 당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산화한 영령들을 자연스럽게 추모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라는 어느 정치인의 말이 문뜩 떠오른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한적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영흥도지만, 70년간 6·25전쟁은 정전 상태로서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고 3년 넘게 이어진 전쟁에 부담을 느낀 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올해로 꼭 70년 전의 일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토대 마련한 특수첩보대원
인천 옹진군 영흥면 내리해안 부근에 전시된 영흥도 해군 퇴역함 참수리 263호정.
해군 특수첩보대가 탄생한 것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당시 북한군의 남침이 가속화하자 연합군은 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킬 작전 하나를 감행하기로 하는데, 이름하여 ‘인천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선 인천 지형과 적군 상황 정보가 필요했다. 한국어와 인천 지리 특성을 모르는 미군 첩보부대 투입은 어려웠을 터. 맥아더 장군은 손원일 당시 해군참모총장에게 국군만이 알 수 있는 인천 일대 정보 수집을 요청했고, 이때 탄생한 것이 해군 특수첩보대다. 특수첩보대와 영흥도 주민의 희생이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불가능했던 셈이다.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연합군이 열세에 있던 6·25전쟁 상황을 단순에 뒤집은 전투다. 수도 서울 탈환이라는 발판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보급로를 차단해 낙동강 전선의 북한 주력부대를 와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해군 특수첩보대의 첫 작전은 ‘영흥도 첩보전’이었다. 당시 국군은 북한군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한 상황이었기에 인천 앞바다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 서울, 수원 등까지 잠입하는 것을 작전으로 세웠다. 당시 국군은 이 작전명을 ‘엑스레이(X-ray)’라고 칭했는데,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적군 내부를 사진처럼 파헤치라’는 뜻이 담겼다.
해군 첩보부대의 ‘엑스레이’ 작전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당시 작전을 주도했던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이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정책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살펴보자. 해군 첩보부대는 1950년 8월 18일 오전 1시 어선으로 위장한 첩보선에 몸을 싣고 부산에서 출발해 영흥도로 잠입했다. 적군에게 납치될 상황에 대비해 어선 밑바닥엔 시한폭탄을 장착해 자폭을 준비했다. 대원들은 정보국 지하조직 요원이었던 정보원을 포섭해 인천 해안포대 위치와 병력 배치, 병력 규모 및 화력, 기뢰 매설 위치, 상륙 지점 지형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 인천만에 진입하려면 해군 첩보부대가 반드시 항로 수심을 측정해야 했다. 인천만 수로 폭이 너무 좁은 데다 9m 넘는 조수간만의 차 때문에 첩보부대의 함정이 진입하기 쉽지 않았으나 이를 극복하고 항로 수심 측정에 성공했다. 국군이 상륙 가능한 시간은 밀물이 들어오는 2시간이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는 즉각 미 극동군사령부로 송신돼 인천상륙작전의 세부 계획 수립에 반영됐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를 앞두고 임무를 수행한 첩보부대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철수를 서두르던 오전 2시, 국군의 첩보 활동을 뒤늦게 감지한 북한군이 영흥도를 기습했다. 적의 공격으로 당시 영흥도에 남아 있던 청년방위대 전원이 전사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적을 유인해 일부 대원들을 탈출시킨 후 북한군 1개 대대에 포위당했다. 인천상륙작전 기밀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1950년 9월 14일 권총으로 자결했다. 당시 두 사람은 31살, 24살 청년이었다.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전사한 이후 미국 정부는 두 사람의 공적을 기려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하고, 한국 정부는 임병래 중위를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홍시욱 하사에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영흥도에 해군 영흥도 전적비가 세워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년째 자원봉사하며 영흥도 전적비 관리
십리포해수욕장의 명물로 알려진 150여 년 된 소사나무 군락 가운데에 인천상륙작전 전초기지비가 설치돼 있다.
6·25전쟁은 이 땅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름 없이 죽어간 병사들의 원혼처럼 전적비 주변에 피어난 무궁화 꽃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전투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순국과 애국이라는 정신을 남겼다. 영흥도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영흥지구 전투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용사를 위해 영흥지구 전투 전사일(9월 12~13일)과 현충일(6월 6일)을 ‘추모의 날’로 정하고 묵념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2006년 이 행사를 처음 구상하고 개최한 변승평(86) 씨는 당시 우연히 영흥도에 왔다가 해군 영흥도 전적비 추모제를 올리는 이가 없다는 걸 알고 해군 첩보부대 공적을 알리기 위해 이곳에 정착해 자원봉사활동에 투신했다. 그렇게 시작한 자원봉사가 올해로 18년째 접어들었다.
“2001년 영흥대교가 건설되고 관광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무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해군 영흥도 전적비가 세워진 거죠. 누구도 관리하지 않아 전적비 상황이 열악했는데, 현충일에도 영웅을 기리기 위해 추모하려는 이가 없었어요. 저라도 숨은 영웅들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가의 소중함을 공감하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변 씨가 활동하는 관광레저동호회 회원 10명이 좋은 일에 동참하겠다며 십시일반 회비를 모아 추모식에 동참했다. 대한민국 해군전우회도 변 씨와 함께 이 행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후원했다. 2014년부터 추모식에는 수십 명의 유치원생과 초·중·고 학생들이 참석했다. 학생들이 영흥지구 전투 영웅을 향해 묵념하며 그들의 뜻을 가슴에 되새기면 좋겠다는 변 씨의 제안에 학교 측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 전쟁에 참전한 노병 2명도 참석했다. 영흥도 첩보전이 역사에서 서서히 잊히면서 섭섭해하던 노병들은 “자신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례했다. 후손들이 추모식을 여는 것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영흥도 엑스레이 접보작전’ 영화화 추진
6·25전쟁 당시 전사한 남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여승 최선규 스님이 1983년 창건한 통일사.
“2017년까지 개인과 단체의 후원으로 추모식을 진행해왔습니다. 추모식 참석자가 수백 명으로 늘어나자 감당하기가 벅차더군요. 10년 가까이 후원해오던 일부 동호회 회원들이 더는 경제적 지원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더라고요. 그 길로 영흥면사무소를 찾아가 면장에게 추모식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어요. 그간의 사정을 들은 면장이 요청을 수락한 덕에 2018년부터 지금까지 영흥면사무소 지원을 받아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변 씨는 ‘영흥도 엑스레이 첩보작전’을 영화로 제작하기 위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숨은 영웅들이 국민들에게 재조명돼 국가의 소중함을 공감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변 씨는 영화계에서 일했던 이력과 경험을 살려 현재 사단법인 한국영화인총연합회 옹진군지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영흥도 엑스레이 첩보작전 영화화는 내 인생 마지막 과업일 것”이라고 말했다.
변 씨는 18년째 365일 아침 해군 영흥도 전적비에 ‘출근’해 자원봉사하면서 대한민국이 굳건할 수 있는 힘은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한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과 참전용사를 대우하는 정책을 펼치고 추모식과 전적비를 관광자원으로 발전시켜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다. ‘전쟁’과 ‘평화’라는 두 단어는 이렇게 18년째 변 씨의 봉사로 영흥도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함께 둘러보면 좋은 옹진 여행지
영흥도 해군 퇴역함 참수리 263호정
인천 옹진군 영흥면 내리해안 부근에는 연평해전 당시 참전했던 고속정과 같은 모델의 참수리호가 함상공원으로 조성돼 관광객을 맞이한다. 참수리호는 대한민국 연안의 경비와 보안을 담당하는 고속정이다. 무게는 133톤에 달하며 길이 33m, 폭 7m에 이른다. 옹진군은 관광기반시설 조성사업을 위해 2014년 해군과 사전 협의 후 진해에 있는 퇴역 함정을 인천까지 예인해 무상임대 조건으로 영흥도에 설치했다.
십리포해수욕장
인천상륙작전 전초기지비
십리포해수욕장은 영흥대교 부근의 내리선착장에서 10리(4㎞)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 붙여진 해수욕장이다. 겨울철에는 강한 북서풍으로 모래가 많이 날려 인접한 마을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방풍림으로 300여 그루의 소사나무를 해수욕장과 마을 사이에 심었다. 이것이 십리포해수욕장의 명물로 알려진 150여 년 된 소사나무 군락이다. 십리포해수욕장에는 인천상륙작전 전초기지비가 설치돼 있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십리포해수욕장에서 팔미등대 탈환작전을 위해 해군 특수대원들이 어선을 타고 영흥도에 도착해 북한군과 싸우다 희생한 이들의 정신과 애향심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영흥도 통일사
실향민의 안타까움을 달래고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사찰이다. 6·25 전쟁 당시 전사한 남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여승 최선규 스님이 1983년 창건했다. 스님의 남편 서형석 씨는 1951년 1·4후퇴 당시 학도병(당시 하사관)으로 서부전선에서 1개 소대 병력으로 중공군 대부대와 맞서 싸우다 전우들이 모두 전사하자 자신도 장렬하게 자결했다고 한다. 그 후 미망인이 된 스님이 그 한을 풀기 위해 이곳 국사봉에 통일사를 지었다. 대지 70평, 건평 20평의 소규모 사찰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있으며 조국 통일 기원 염불을 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