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155마일
⑤ 경기도 연천
‘평온 속 긴장’
연천 민통선 마을의 70년
경기 연천군청에서 북쪽으로 20여 분 차를 달리면 24가구 53명이 거주하는 작은 농촌 마을 ‘횡산리’에 닿는다. 마을 초입으로 들어서자 구릉지 두둑에 피어난 율무의 환한 푸른빛이 맨 처음 눈에 들어온다. 비끼산이 마을 북쪽을 둘러싼 형태라, 동네 이름에 비낄 ‘횡’(橫) 자와 뫼 ‘산’(山) 자가 붙었다. 길은 깨끗하고 논에 촘촘히 심어진 작물은 햇살 아래 그저 푸르러 보일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을 곳곳에 서 있는 초소가 눈에 들어온다. 더 자세히 보니 길가나 숲 근처에는 빨간색 역삼각형 표지가 매달려 있다. 가까이 다가가 표지에 새겨진 글자를 읽어본다. ‘지뢰’. 선명한 글씨가 마을의 평화로움에 균열을 일으킨다. 횡산리는 휴전선 바로 밑, 경기 연천군의 유일한 민간인통제선(민통선) 내 마을이다.
전쟁 겪은 황무지가 국내 최대 율무 생산지로
횡산리에 들어가려면 민통선 입구 통제소에서 방문지와 방문 목적을 밝혀야 한다. 검문을 거쳐 들어간 마을은 고요한 정적에 덮여 있었다. 인적 드문 거리를 한참 걷다 발길이 닿은 곳은 횡산리 마을회관. 이곳에서 밭일을 하다 막 회관에 들어온 김학용(69) 횡산리 이장과 만났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에 단단해 보이는 체격. 전형적인 농부로 보이는 그가 녹차를 내오고 기자와 마주 앉았다. 김 이장이 풀어낸 이야기를 들으며, 질곡의 세월을 거쳐온 이 마을의 역사를 돌아봤다.
횡산리는 1914년 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연천군 중면에 편입됐고, 광복 후 38선 북쪽이라 공산 치하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11월에야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한국이 행정권을 수복했다. 그러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지역인 까닭에 민간인이 거주할 수는 없었다. 오직 농사를 위한 출입만 허가됐다. 오랫동안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던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터 잡고 살기 시작한 건 1985년 9월. 김 이장은 이 시기에 횡산리 전략촌으로 들어온 1세대 이주민이다.
횡산리마을회관 건너편에 서 있는 횡산리 표지석.
‘횡산(橫山)’이라는 이름은 마을 북쪽을 둘러싸고 있는 ‘비끼산’에서 따온 것이다.
“고향은 충남 천안이에요. 그곳에서 농사 짓고 살다 1970년대에 군인들 대상으로 영농 교육을 하느라 여기 왔었죠. 이후 인연이 닿아 아예 정착해 살게 된 거예요. 처음 정착할 때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개간하려고 파헤칠 때마다 지뢰가 나와서 온종일 군인들과 같이 있었어요. 지금은 산비탈을 개간해 율무 농사를 짓고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개간해 율무, 벼, 콩, 고추를 경작하게 됐다니 격세지감이 듭니다.”
김 이장이 들려준 얘기다. 그에 따르면 남북 대치가 이어지던 시절, 횡산리엔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간첩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군인이 탱크를 몰고 들이닥치는 게 예사였고, 논과 밭엔 실탄과 탄피가 널려 있었다. 2000년대 들어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된 뒤에도 횡산리의 긴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03년 7월, 비무장지대(DMZ)에서 아군과 북한군 사이 총격전이 벌어졌다. 2015년 8월엔 북한군이 민간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빌미로 남측을 향해 고사총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횡산리 중심지인 중면행정복지센터 마당 구석에 고사총탄 한 발이 떨어지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김 이장은 “에이, 어디서 산들 고생 안 하고 살 수 있대요?” 하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경기도와 연천군이 함께 세운 DMZ백학문화활용소. 이곳에서는 6월 30일까지 6·25전쟁 정전 70주년 기념 전시가 열린다.
“어찌 생각하면 민통선 안 마을이 더 안전할 수도 있죠. 군부대가 24시간 지켜주니 도둑 없고, 공기 깨끗하고, 물 맑고, 인심도 후해요. 이런 곳 진짜 어디 없습니다. 외부인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도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웃 간의 정이 있으니까요….”
현재 횡산리 땅은 대부분 주민 개인 소유로, 주민 한 사람이 적게는 3만3057㎡(1만 평)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김 이장 경작지는 16만5000㎡(5만 평)쯤 된다. 김 이장은 “마을 사람들이 다양한 작물을 기르는데, 수익 면에서 율무 농사가 가장 낫다”고 말했다. 현재 전국 율무의 70%가량이 연천에서 생산된다.
그는 쌀 자랑도 덧붙였다. 전국 쌀이 모이는 품평회에 가면 ‘남토북수(南土北水) 반딧불이쌀’이 맛있고 질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고도 자랑했다. 남토북수는 연천군 농특산물 통합 브랜드로, 북쪽 깨끗한 임진강 물과 남쪽의 비옥한 연천 토지에서 생산한 청정 농특산물을 의미한다.
연천 임진강 두루미류 도래지. 이곳에서는 겨울이면 율무 낙곡을 먹는 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다.
‘율곡 낙곡’ 먹는 천연기념물 두루미
김 이장과 인사를 나누고 다시 차에 오른다. 5분 정도 논길을 달려 찾아간 횡산리 130번지 일대에는 김경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DMZ운영위원장이 마을 주민과 율무밭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자연환경과 문화자원을 보존해 미래세대에 물려주는 운동을 전개하는 민간단체다. 2019년 회원 191명이 모금한 돈으로 횡산리 율무밭 3180㎡(약 960평)를 매입해 두루미 서식지 보호에 나서고 있다. 겨울이면 횡산리를 찾는 수많은 겨울 철새에게 먹이를 주는 캠페인도 벌인다. 한탄강 지킴이를 자처하는 환경운동가 김 위원장은 “두루미가 여기서 율무 낙곡을 먹는 거 아느냐”며 반갑게 말을 건넸다.
“매년 겨울이면 새들이 몇만 마리나 횡산리로 날아와요. 9월 중순 기러기를 시작으로 10월이면 재두루미, 독수리가 몰려오죠. 매년 가을이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두루미 3000여 마리가 율무 낙곡을 먹는 희귀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연천군 백학마을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 입구. 6·25전쟁 당시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그의 말대로 두루미는 해마다 시베리아에서 장장 1600㎞를 날아 유네스코(UNESCO) 생물권보호지역 임진강 권역에 온다. 섭씨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시베리아에서 먹이를 찾을 수 없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날아온 두루미들은 지친 몸을 추스르며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율무 낙곡을 먹는다. 김 위원장은 “안보상의 이유로 일반인 접근이 통제된 DMZ와 민통선 마을이 두루미의 낙원이 된 것”이라며 말을 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천 땅을 점유한 일부 사람이 겨울에 축산분뇨,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불법적으로 인삼 농사를 짓는 바람에 DMZ 일원 생태계가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어요. 제가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기후위기 시대에는 환경과 생태가 곧 경쟁력이다’라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죠. 이제는 주민들이 임야를 내놓고 농기계를 가져와 율무밭을 정성껏 가꿔요.”
백학역사박물관 지하 1층 입구에는 태극기와 필름 모양 벽화가 그려져 있다.
경원선 연천역 왼쪽에 있는 급수탑과 증기기관차.
탑 외부에는 6·25전쟁 당시 생긴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횡산리는 요즘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다. 두루미 서식지인 임진강 생물보전지역 등 DMZ 연천의 환경을 내세워 젊은이와 관광객을 끌어들이겠다는 구상이다. 지난해 5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임진강 두루미류 도래지’ 앞에는 두루미를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도 설치됐다. 겨울철이면 1000명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새는 저렇게 자유로운데…”
임진강 두루미류 도래지 전시관 벽에는 흑두루미, 검은목두루미, 캐나다두루미, 시베리아흰두루미 등 각종 두루미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다. 설명문의 문장 하나가 시선을 붙든다.
“임진강은 휴전선이 강폭 중간을 지나는 남북 공유 하천이다. 북에서 아침에 깨어난 두루미가 남으로 날아와 먹이 활동도 하며 놀다 저녁에 돌아간다.”
김 위원장이 이 대목을 함께 바라보다 “새는 저렇게 자유로운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전시관 한쪽에 마련된 망원경으로 두루미 서식지를 바라봤다. “여름이라 두루미는 안 보일 것”이라는 김 위원장 말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무성한 초록 숲뿐이다. 그러다 문득, 숲속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아기 고라니 한 마리가 무엇에 놀랐는지 껑충거리며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연천군 신망리는 미군이 6·25전쟁 피난민 정착촌으로 조성한 마을이다.
미군이 붙인 ‘NEW HOPE TOWN(새로운 희망 마을)’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바꿔 새로운(新·신) 희망(望·망)이 싹트기 바라는 염원을 표현했다.
함께 둘러보면 좋은 연천 여행지
백학역사박물관
백학마을의 100년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자 연천군 백학면 주민자치위원회가 2018년 11월 개관해 직접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 백학마을은 2015년 국가보훈처로부터 호국영웅정신 계승 마을 제1호로 지정됐다. 백학면은 6·25전쟁 당시 지게부대라 불린 노무자부대의 전투보급 지원으로 박고지 전투 등 치열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노무자부대원이 활동한 지역이다. 백학역사박물관에서는 이 지역 호국영웅에 대한 소개와 벽화, 제1땅굴 모형, 군부대와 마을주민이 기증한 각종 유물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연천역 급수탑
연천역은 38선 북쪽에 위치해 광복 이후 소련이 관리했다. 1948년 승강장 서쪽에 화물용 승강장을 만들어 군용 물자를 수송하던 시설이 지금도 남아 있다. 연천역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원통형 급수탑과 상자형 급수탑도 보인다. 높이 23m, 둘레 18m 크기 원통형 급수탑은 1914년 만든 것. 겉면에는 6·25전쟁 과정에서 생긴 총탄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됐다.
신망리역
신망리의 ‘신망’은 ‘새로운 희망이라는 뜻이다. 1954년 5월 미군 제7사단이 피난민을 위해 만든 정착지로, 새로운 희망을 품으라는 의미에서 ‘New Hope Town’이라 불렸다. 정착지 규모는 9만9173㎡(3만 평) 정도이며 격자 구획으로 나뉜 곳으로 추정된다. 한 가구당 330㎡ 대지에 59.4㎡ 목조 가옥을 만들었다. 대략 100평 대지에 18평 규모의 주택을 100호 건립해 선착순으로 피난민을 이주시켰다고 한다. 전쟁 이후 연천에 가장 먼저 피난민이 들어온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