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비전 인터뷰
“예술로 확인한 평화통일의 희망”
추상미 ‘폴란드로 간 아이들’ 감독
추상미는 1994년 데뷔 후 연극, 영화, 드라마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다. 2009년 드라마 ‘시티홀’을 끝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하고 연출을 공부한 그는, 2018년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통해 감독으로서도 놀라운 역량을 갖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이 작품은 6·25전쟁 도중 부모를 잃고 동유럽 낯선 나라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어느 날 갑자기 북한으로 송환됐던, 우리가 미처 몰랐던 수많은 전쟁고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추 감독은 왜 이 영화를 만들었을까.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가 오래전 그 어린이들 이야기를 다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여러 궁금증을 안고 추 감독을 만났다.
추상미 감독 (웰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구상한 건, 제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어요. 아이를 낳고 한동안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시절, 우연히 북한 꽃제비에 대한 영상을 봤거든요. 자연스레 우리 아이가 떠오르고, ‘저 아이 엄마는 어디 있을까’ 궁금해졌죠. 알고 보니 영상이 찍혔을 때 이미 아이 엄마는 세상을 떠난 뒤였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더군요. 생각해보면 그 아이가 먹을 것을 찾아 떠도는 곳에서 우리 집까지 차로 겨우 몇 시간 거리잖아요. 그렇게 가까운 곳에 영상 속 소녀 같은 아이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2014년의 일이다. 그 무렵 추상미 감독에게 또 하나의 우연이 찾아왔다. 지인의 출판사에 들렀다가 출간 검토 단계에 있던 실화 소설 ‘천사의 날개’를 본 것이다. 폴란드 언론인 욜란타 크리소바타가 쓴 이 책은, 1951년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진 6·25 전쟁고아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동유럽으로 보내진 6·25 전쟁고아들
“6·25전쟁 당시 생겨난 고아가 남북을 합쳐 10만 명이 넘는다는 거, 아시나요? 당시 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던 북한은, 아이들을 사회주의 동맹국에 보내 위탁 교육을 시키기로 결정해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러시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으로 보내졌죠. 크리소바타는 그중에서 폴란드에 도착한 아이들에 대해 취재해 책을 쓴 겁니다.”
마침 꽃제비 영상으로 마음이 크게 아팠던 뒤라 책 속 아이들 이야기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추 감독은 세계 각국 자료를 뒤지며 치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당시 폴란드에 도착한 6·25 전쟁고아는 6000명에 달했다. 이 중 일부는 사회주의 국가 결속을 선전할 목적으로 언론에 공개됐지만, 절대 다수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 특히 폴란드 서부 작은 마을 프와코비체에서 북한 고아를 위한 대규모 양육원이 운영된 건 철저한 보안사항이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폴란드 사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당시 폴란드 공산당의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추측이다.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등장하는 사진들. 폴란드에서 생활한 전쟁고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바로 그 시절, 세상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쳐놓은 프와코비체 커튼 안에서 폴란드인 교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난 만 3~10세 북한 고아 1200여 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추 감독은 이 아이들의 흔적을 찾아내고자 2016년 가을 폴란드행 비행기에 올랐다. 놀라운 건 60여 년 전 과거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프와코비체의 교사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쏟아냈다는 점이다. 이유는 오직 하나,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아흔을 넘긴 당시 프와코비체 양육원장은 6·25 전쟁고아들과 주고받았던 교감에 대해 설명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北 송환 후 긴 이별
“처음엔 이상하기도 했어요. 이분들이 낯선 땅에서 온 아이들에 대해 가진 사랑이 좀 과도하다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고, 폴란드의 역사를 되짚으며 비로소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추 감독의 설명이다.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도 가장 피해가 컸던 나라로 손꼽힌다. 알고 보니 당시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6·25 전쟁고아를 돌봤던 교사들은 모두 유년기에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경험한 이들이었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 출신 교사가 적잖았고,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살아남은 유대인 생존자 교사도 있었다. 이들에게 북한에서 온 전쟁고아는 ‘남’이 아니었다. 자신과 똑같은 상처를 가진, 자신들의 유년기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분신이었다는 게 추 감독 설명이다.
“프와코비체 양육원장님은 1951년 기차역에서 북한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본능적으로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느끼셨다고 해요. 그래서 자신들을 ‘선생님’ 대신 ‘엄마’ 또는 ‘아빠’라고 부르게 하셨답니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아이들도 금세 선생님을 부모처럼 여기며 폴란드어를 익혀 나갔고, 선생님들 또한 우리말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제가 만난 폴란드인 선생님들은 지금도 ‘식사’, ‘빨리’ 같은 우리말을 기억하고 계셨어요.”
추 감독의 얘기다. 폴란드인 교사들은 프와코비체에 처음 도착했을 때 두려움에 떨며 경계심을 드러내던 아이들이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상처 또한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1959년, 이들에게 갑작스러운 이별이 찾아왔다. 북한에서 전후 피해 복구를 위한 대규모 노동력 동원, 이른바 ‘천리마 행군’이 시작되면서 6·25 전쟁고아를 전부 본국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아이들은 폴란드에 남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북한에 돌아갈 경우 가혹한 노동에 시달릴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추 감독이 만난 한 교사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떤 아이들은 (북한에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 위에 눕거나 자기 몸에 찬물을 끼얹었어요. 몸을 아프게 해서 가지 않으려고요. 그러나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죠. 너희 나라가 너희들이 필요하단다.”
눈물 섞인 이 증언은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랑으로 길러낸 아이들을 무력하게 떠나보낸 경험은 폴란드인 교사들에게 깊은 회한으로 남았다. 추 감독은 “이 과정을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폴란드 선생님들이 왜 그리 아프게 눈물을 흘리시는지, 여전히 아이들을 마음 깊이 그리워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폴란드 촬영에 동행한 북한 소녀 송이, 프와코비체 양육원 교사와 함께한 추상미 감독. (커넥트픽쳐스 제공)
이 영화를 촬영하며 추 감독이 깨달은 점은 또 있다.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을 마음을 다해 품어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폴란드 교사들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존재를 향해 진정한 사랑을 베풀었기에, 그들 자신 또한 깊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폴란드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 마음 속에도 치유의 기억이 소중하게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처 입은 존재의 연대’와 그로 인한 ‘상호 치유’는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다. 이 주제의식은 추 감독과 함께 폴란드 취재에 동행한 탈북 소녀 이송의 존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송이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북한에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 한국에 왔다. 추 감독이 폴란드 촬영에 그를 동반한 건,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6·25 전쟁고아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재 초기, 송이는 추 감독을 향해 도무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가 시작된 건 폴란드 현지에서 옛 양육원 교사들을 만나면서부터. 특히 폴란드인 교사가 송이를 바라보며 과거의 제자들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며 꼭 안아주자 송이 또한 같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송이는 나중에 “폴란드 선생님들이 북한 아이들에 대해 ‘똑똑하고 예쁘고 성실했다’고 회상하시는 걸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알고 보니 송이는 한국에서 늘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꼈다고 해요. 사람들이 북한 사투리를 알아차릴까 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지냈고요. 그런데 폴란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북한 출신인 게 자랑스럽게 느껴졌다고 하더군요. 송이는 그 순간, 힘들었던 남한 생활을 극복하고, 북한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긍정하게 된 거예요. 그 경험 이후 아이가 제게 남북한 양쪽에서 겪은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추 감독의 말이다. 폴란드를 다녀온 뒤 송이는 상처입은 사람을 돕는 선교사가 되고자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저는 이 영화를 촬영하며 상처 입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고, 상처에서 시작된 연민과 공감이 사랑으로 이어지면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동시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한 희망도 갖게 됐습니다. 우리는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잖아요. 그로 인해 분열과 증오가 싹트기도 했지만, 결국은 상처에 대한 성찰을 통해 진정한 소통과 공감, 치유가 시작될 거라고 믿습니다. 이 희망을 제 영화를 보신 분들도 함께 느껴주시길 바라요.”
추 감독은 앞으로도 예술을 통해 평화통일의 희망을 전하고자 계속 노력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그 덕에 통일의 날이 조금이라도 앞당겨진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반도가 통일될 경우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폴란드 취재 여행에서 한 교사로부터 들은 부탁 이야기를 꺼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 2018년 개봉 당시 포스터. 당시 이 작품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김대중노벨평화영화상’을 받는 등 큰 화제를 모았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아흔이 넘은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며 제게 말씀하셨어요. 언젠가 자신이 돌봤던 전쟁고아들을 만나게 되면, 그 아이들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요. ‘사랑했다’가 아니라 ‘사랑한다’고 하시던 모습이 잊히지 않아요. 그때부터 통일 후 제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죠. 저는 통일이 되면 북한에 가서 폴란드 프와코비체에 머물렀던 6·25 전쟁고아를 찾을 겁니다. 그분들께 평생 당신을 그리워한 폴란드 선생님이 계셨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어요.”
6·25전쟁 이후 어느새 7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1951년 폴란드로 보내졌던 아이들 또한 이제는 70~80대 노인이 됐을 것이다. 추 감독의 바람처럼 그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통일의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