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산책

휴전선을 품은 평화의 고장 연천

파주와 연천군 장남면을 잇는 다리인 장남교를 건넌다. 연천은 땅 전체가 안보관광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녘에 고향을 둔 이뿐만 아니라 분단의 현장을 직접 보려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은 까닭이다. 32km나 되는 휴전선이 가로지르는 연천을 찾았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연천군 장남면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예전에는 황해도 땅이었는데 분단 이후 파주에 편입됐다가 다시 연천군 땅이 되었다. 장남면에 속한 1·21무장공비침투로와 승전전망대(이하 승전OP)는 한국전쟁의 상흔이다. 1968년 1월 17일 23시, 북한군 제124군 소속 김신조 외 30명이 남방한계선을 넘어 침투했다. 서울로 잠입해 대통령 관저를 폭파하고, 요인을 암살하고, 중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1월 19일 21시경 파주시 법원리에 살던 나무꾼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다. 군·경 합동으로 이뤄진 무장공비 소탕작전은 1월 20일부터 열흘간 이어졌다. 결과는 사상자 29명, 도주 1명, 체포 1명. 우리쪽 피해도 적지 않았다. 민간인 통제구역인 무장공비침투로에는, 당시 이곳에 주둔한 미군 제2사단 방책선 부대가 설치한 경계 철책과 철조망을 뚫고 침투했던 무장공비 모형이 남아있다.

무장공비침투로에서 가까운 승전OP는 북한 땅과 연천평야를바라볼 수 있는 최전방 관측소로, 북한의 군사시설과 북한군의 활동 상황을 망원경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시설을 보기 위해서는 민통선 초소에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며 25인 이상일 경우 일주일 전에 출입 신청을 해야 한다.

발길이 머무는 역사와 유적

민통선 지역을 빠져나오면 고랑포구 역사공원이 기다린다. 1930년대 고랑포 일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재현해놓은 곳으로, 고랑포구의 역사와 지리 등을 가상현실(VR)과 증강현실(AR) 기술을 통해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고랑포는 개성과 서울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포구 주변은 늘 북적거렸다. 서해안을 따라 임진강을 거슬러 생선, 새우젓, 소금을 실은 배가 올라오고 이 지역 특산물인 콩과 인삼 등이 개성과 한성으로 팔려나갔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는 우체국, 양장점, 시계포, 우시장 등이 들어섰고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분점이 버젓이 자리를 잡을 정도로 번성했지만, 한국전쟁과 남북분단으로 인해 옛 영화는 사라졌다. 역사공원 안으로 들어 가면 전성기의 고랑포구 나루터와 저잣거리를 볼 수 있고 야외 마당에서는 한국전쟁에 참전해 용감하게 활약했던 군마(軍馬) 레클리스(1948~1968)의 동상을 볼 수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자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알려진 경순왕(제56대, 재위: 927~935)의 무덤도 지척에 있다. 신라 왕릉은 대부분 경주에 있지만 유일하게 경순왕만 이곳 에 묻혔다. 왕릉 뒤편 야산 너머는 남방 한계선과 이어지는 삼엄한 지역으로 곳곳에 지뢰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고랑포구 역사공원 아래에는 호로고루성지(사적 제467호)가 있다. 당포성, 은대리성과 함께 고구려 3대 성에 속한다. 임진강 북쪽 기슭의 현무암 단애(斷崖) 위 평지에 형성돼 있는데 5~7세기경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것이다.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폭이 넓어지고 수심이 깊은 데다 현무암 지대를 따라 깎아지른 듯한 단애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때는 장단읍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으며,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을 지나 문산 쪽으로 직진하지 않고 우회해 이곳에서 강을 건넜다.

한편, 은대리성은 한탄강과 차탄천이 합류하는 삼각형 모양의 언덕에 쌓은 성이다. 흙으로 덮인 동쪽 석축만 일부 남아 있는데 석축의 구조가 좀 약하기는 해도 토축과 석축을 결합한 독특한 고구려 축성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미산면 동이리 임진강변에 있는 당포성은 수직 낭떠러지 위에 자리잡아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밀려 한강 유역에서 후퇴한 고구려군이 임진강을 국경선으로 삼고 대치하게 되는데, 이때 당포성이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보여주는 자연의 신비

당포성을 지나 임진강 옆으로 난 ‘평화누리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임진강 주상절리를 만날 수 있다. 40m 높이의 수직 절벽이 2.5km에 걸쳐 병풍처럼 뻗어 있는 임진강 주상절리는 자연의 신비 그 자체다. 옛사람들이 ‘임진적벽(臨津赤壁)’이라고도 불렀던 이곳은 연산군을 비롯해 미수 허목, 겸재 정선 등 여러 문인이 뱃놀이를 즐기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곳이다. 풍경 좀 볼 줄 안다는 사람들은 노을이 질 때와 가을날 오후에 절벽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가 붉게 물들 때 임진강 주상절리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주상절리는 이곳 임진강 일부를 비롯해 한탄강 전 구간에서 볼 수 있으며 국가지질공원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가치 있다는 방증이다. 한탄강은 북한 평강군에서 발원해 철원, 포천을 지나 연천에서 임진강과 만난다.

연천의 중심지는 군청이 있는 연천읍이지만 한탄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전곡읍에 인구의 대부분이 모여 산다. 전곡읍에 있는 한탄강유원지는 힐링 명소다. 한탄강변에 들어선 선사유적지와 선사박물관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구석기시대의 유적이다.

1978년 4월, 주한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은 여행차 한탄강에 왔다가 우연히 낯선 돌 네 개를 주웠다. 이 돌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사진을 찍고 발견 경위 등을 적어 서울대박물관에 보냈다. 밝혀진 바로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구석기 유물. 그 후로 17차례의 발굴조사를 거쳐 총 6천여 점의 유물이 이곳에서 출토됐다. 기원전 30만 년 전(전기 구석기시대) 한탄강 유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도 함께 밝혀졌다. 여기서 발굴된 유물은 양면 핵석기, 외날찍개, 찌르개, 긁개, 새김돌, 망치, 석핵, 화분, 목탄 등 다양하다. 드넓은 유적지공간에는 선사체험마을을 비롯해 토충전시관, 구석기 산책로 등 다양한 체험시설이 마련돼 있다. 선사유적지 안에 있는 전곡선사박물관은 아름다운 곡선 모양으로 지어져 눈길을 끈다. 선사시대의 화석인류와 기후별 동물과 자연환경을 만나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을 비롯해 오래된 미라가 전시된 고고학 체험실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마련되어 있다.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전망대

연천에는 북한 땅을 바라볼 수 있는 4개의 전망대가 있다. 앞서 가본 승전OP와 백학면의 상승전망대(제1땅굴), 중면의 태풍전망대, 신서면의 열쇠전망대 등이다. 남방한계선 바로 아래 있는 열쇠전망대에 오르면 저 멀리 북한의 선전마을인 마장리 마을이 보인다. DMZ철책선과 최전방 초소인 GP, 내부 전시실에는 북한의 생활용품과 대남 전투장비가 전시돼 있다. 태풍부대에서 세운 태풍전망대는 전망대에서 휴전선까지 800m, 북한군이 있는 초소까지는 1,6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현재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알려져 있다. 실제 이곳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철책 너머 북한 땅, 오장동 농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망원경 없이도 밭일하는 북한 주민이 보인다고 한다.

태풍전망대로 가는 길에 있는 연강갤러리는 민통선 안에서는 보기 드문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예전의 안보전시관을 리모델링해 갤러리로 만들었는데 건물 외관이 특히 아름다워 눈길을 끈다. 이곳에선 8월 30일까지 이웅배 작가의 ≪부드러운 장벽 展≫이 열린다. 남북 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로, 남북 분단의 상징인 장벽을 걷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두꺼운 장벽이 아니라 ‘부드러운’ 장벽이 되어 마치 커튼처럼 누구나 왕래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 바라보기만 하는 전시가 아니라 작품을 직접 만져볼 수도 있다.

작품 〈부드러운 장막〉과 〈가로지르는 미로〉를 보고 건물 2층으로 올라가면 이웅배 작가의 세 번째 작품인 〈고랑포리 -도밀리〉를 만나게 된다. 한반도를 동서로 지르고 있는 휴전선이 연천군의 양쪽 끝인 장남면 고랑포리와 신서면 도밀리를 지나가는 것에 착안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차갑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민통선 안에서 이런 부드럽고 정감 있는 전시회가 열린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철원 방면 연천 북쪽의 신탄리역은 철원 백마고지역이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경원선의 종점이었다. 신탄리에서 백마고지역까지는 5.6㎞. 60년간 끊겼던 경원선 철로는 다시 태어났지만 현재는 운행이 중단돼 아쉬움을 더 한다. 신탄리역 뒤쪽에 있는 고대산(해발 832m)은 민통선과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명산이다. 경기도와 강원도 철원 땅의 경계에 솟은 산으로 정상에서 굽어보는 전망이 빼어나다. 동쪽으로는 금학산이, 남동쪽 멀리로는 명성산이 아스라하다. 그뿐이랴. 갈 수 없어 안타까운 북녘 땅도 손에 잡힐 듯하고 곡창지대인 철원평야와 한국전쟁 때 격전을 치렀던 백마고지도 멀리 내려다보인다.

연천 여행은 한탄강 상류 가마골 입구에 있는 재인폭포에서 마무리하자. 현무암 바위가 깎여 이뤄진 협곡 사이로 물줄기가 떨어져 더위를 식히기에 제격이다. 비 갠 날, 폭포에 가로 걸쳐진 영롱한 무지개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답다. 절벽에서 쏟아져내린 물줄기는 깊은 골을 타고 내려가 한탄강 상류로 빠진다.

김초록
문화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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